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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아 Jul 01. 2019

쉽지 않은 일

그 대단한 걸 해내지 말입니다.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왔다. 생리 어플을 켜보니 낼모레가 생리 예정일.


한 번도 빠짐없이, 20여 년을 매달 꼬박꼬박 시간 맞춰 찾아오기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인체의 성실함은 언제나 기대 이상이다. 나는 전투에 나서기 전, 경건한 마음으로 총알을 준비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구급약 통에서 진통제 몇 알을 챙겨 가방에 주섬주섬 넣었다. 그 모습을 남편이 발견했다.


“어디 아파?”

“아니. 곧 생리 시작할 것 같아서. 약 좀 미리 챙겨두려고.”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로 향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채널을 몇 번 돌리는 듯하더니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혼자 이상한 말을 읊조렸다.


...쉽지 않군...


저 양반이 뭐라는 거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방심했다. 그 말을 조금 더 예리하게 살폈어야 했다. 그럼 충격이 좀 덜했을지도 모른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사진=나혼자산다 캡처)

가방에 총알을 품고 다닌 지가 일주일이 지났건만 그분은 영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번 달은 좀 늦으시네, 공사가 다망하신가? 뭐 하루 이틀, 아니 일주일 정도야 컨디션 따라 왔다갔다 할 수 있지'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불안함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테스트기를 사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만약에라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게 된다면 뒷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의 심장은 매일 0.5cm씩 쪼그라들었다. 내일은 오시겠지, 모레는 오실 거야. 오매불망 오지 않는 그분을 기다리며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문득, 남편이 비 맞은 중 마냥 중얼거린 시답잖은 그 말이 떠올랐다.


“쉽지 않군.”


작정을 한 게로구나!

 

남편의 꿈은 황금돼지띠 자녀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한지 도통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올해 안에 아이를 낳고 싶다고 밥 먹듯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름휴가도 유럽으로 가고 싶었고, 이사도 가야 하고, 무엇보다 아직은 이직한 회사에 적응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차일피일 임신을 미루기만 할 뿐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휴가라도 다녀온 뒤 가을 이후에 아이를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합의가 된 줄 알았건만,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을까.


황금돼지띠 소망을 이룬 남편, 축하해. (사진=전지적참견시점 캡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생리 예정일이 이미 2주 이상 지난 때였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와인 앞에서 머뭇거렸다. 남편은 레드 와인을 살까, 화이트 와인을 살까 물었다. 나는 와인 앞에서 한참을 침묵하다가 어렵게 입을 떼 임신 테스트기를 사야겠다고 말했다. 남편의 입은 떡 벌어졌고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잠시 후,

마트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눈물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와인 못 마셔.


헬로 베이비. (사진=복면가왕 캡처)


언제나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나는 곧 엄마가 된다.




+ 임신을 처음 알게 된 날, 눈물 한 방울을 주르륵 흘렸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너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마음 정리가 덜 됐던 모양입니다. 임신 6개월인 지금, 매우 행복합니다. 아기는 축복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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