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하는 이름들

마라톤에서 발견한 나의 속도와 존재의 이유

by 이서


런닝 붐이 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러닝화를 신고 거리로 나섰고, SNS에는 땀에 젖은 셀카와 완주 기록이 넘쳐났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뛰어야 할까?” 달리면 무릎도 상하고, 피부도 손상될 텐데.


그러나 나도 유행을 따라 런닝화를 샀다.

여행지에서 달리는 것이 색다른 경험이라는 말에 혹해서, 그저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몇 년간 달렸다. 하지만 언제나 남들보다 뒤처지는 기분이었다. ‘러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인 날, 나는 달렸다


화장도, 날씨도, 기분도, 컨디션도,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삐걱거렸다. 아침마다 참아왔던 달달한 커피조차 없으면 하루가 무의미할 것 같아 카페로 달려갔다. 짜증이 쌓였고, 작은 일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답장이 늦은 친구에게도, 나약한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다.


그날, 퇴근 후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이번 주 마라톤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달리는 사람을 따라 뛰었다. 빠른 페이스였지만 함께 뛰니까 덜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페이스가 아닌 타인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원래 여기까지 하려고 했어. 나는 원래 이 정도 실력이야.”

머릿속에서 온갖 합리화가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의 내가 떠올랐다.


나는 언제나 조금 늦었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나는 원래 늦더라도 해내는 사람이다.

달리기가 무섭다는 이유로, 조금 힘들다는 이유로 멈추기엔 나는 너무 많은 걸 이뤄온 사람이었다. 속도가 느려도 결국엔 해내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시 뛰었다.

처음보다 호흡이 안정되었고, 점점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내 페이스가 너무 느린 것 같아 보폭을 조금 더 넓혔다. 같은 걸음을 뛰더라도 보폭이 넓으면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숨이 차지 않는 선에서 보폭을 넓히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법의 주문을 만들다


6~7km 구간에서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몸이 힘든 게 아니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여기까지만 할까?”


합리화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기서 멈추는 건 나의 선택이지만, 멈추지 않는 사람들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살아가다 보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투성이인데,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달리기에서마저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만의 마법의 주문을 만들었다.


“내가 속한 회사의 이름을 속으로 외쳤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회사.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나.

마라톤도 결국 내가 그 회사의 대표로 뛰는 것이 아닌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 글자씩 되새겼다.

놀랍게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원하던 곳에서 일하며, 그 회사의 이름을 달고 마라톤에 나선 사람이구나.”


내가 만든 또 하나의 주문은 엄마의 이름과 내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이었다.

8km부터는 엄마와 나의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9km부터는 아빠의 이름과 내 이름을 붙여 되뇌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느껴본 유일한 존재들, 우리 가족.


그들의 이름을 걸고 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내가 지치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마지막 1km, 나를 지탱하는 이름들


그리고 마지막 1km.


그동안 만들어온 주문을 모두 합쳐 전속력으로 달렸다.

더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또 뛰어졌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초반의 쌩쌩한 페이스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 뛸 수 있는 사람이었다.


10km의 마라톤.

이 짧은 거리에서 나는 나를 밀어붙였고, 나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나를 소속하고 있는 회사, 그리고 나의 가족이었다.”


회사는 때때로 성가시고 지루했지만, 나는 그곳을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익숙해진 탓에 소중함을 몰랐을 뿐.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나는 천천히 가도 결국 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지켜주는 이름들과 함께라면, 나는 끝까지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