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정리 좀 해주시죠?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결과가 인용 일지 기각 일지. 내가 걱정했던 것은 오직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퇴근을 약 5분 남겨둔 그 시간에 협업부서에 업무 요청을 해야 할 일이 ‘또’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그 후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의뢰인에게 보고하고 퇴근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얼마나 부질없는 바람이었던가. 나는 결국, 또 퇴근시간이 임박해서야 송무팀에 오늘 꼭 소송비용을 납부해달라는 요청을 전하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한 회사가 복수의 기관으로부터 그들 영업에 제한이 되는 처분을 받았다. 오랜 기간 자문을 진행해왔던 사건이지만 그날은 시니어 변호사의 지시로 급히 집행정지 신청서가 제출되었다. 의뢰인의 컨텍 포인트가 되는 그 시니어는 근 일 년 간 관련 사건에 대하여 굳이 본인의 비서가 아니라 그의 비서가 할 일까지 내게 당연한 듯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었고, 그의 비서 역시 ‘저는 신입이라(언제까지?)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입장으로 일관하며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본인의 업무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나는 반포기 상태로 그날도 스스로 의뢰인에게 위임장을 받고, 소송 케이스가 오픈되면 정리되어야 하는 이런저런 업무들에 대해 ‘대신’ 전문가들의 확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내 고유의 업무는 덜어 줄 사람이 없었다.
소가 제기되어도 법원은 보통 ‘입금’이 되어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령, 내가 낸 서류를 상대방에게 전달해주는 것도 그 비용이 입금이 되어야 해 준다. 때문에 집행정지 사건의 경우, 사안에 따라 빠른 사건 진행을 위해서라면, 신청서를 접수한 후 바로 인지대와 송달료를 납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매번 소송비용을 법인 비용으로 미리 납부하라는 시니어 M이 배당된 건이었다. 그러나 이후 지시가 모두 예상되는 그때의 나는, 납부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메일을 보내 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결국 ‘예정된 지시’를 받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대기하게 될 것인가를 점쳐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차라리 썸남썸녀의 카톡방에서 사라지지 않는 ‘1’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답답함과 막연함과 화가 휘몰아친다. ‘바쁘다.’, ‘긴급하다.’를 외쳐대던 사람들은 매번 확인이 필요한 일에는 함흥차사니까 말이다.
모두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인 내에는 스탭 메일은 잘 확인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다수의 전문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직원들은 어떠한 결정권도 없는 상황에서 ‘행정적인 부분’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번거로워하는, 때로는 무시하는 담당 전문가로 인해 자주 부조화의 상황 안에 놓이게 된다. 그런 것을 챙기는 것이 우리네 업무이기 때문이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그들이 회신이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전문가 영역의 일을 감히 비서가 묻느냐’인데, 이 경우 당장 내 메일은 무시할지언정 사건 운영은 본인들 고유 영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변호사가 언제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회신을 준다. 때문에 누락사항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는 ‘내가 왜 행정적인 일에 신경을 써야 하죠?’라는 입장이다. ‘변호사니까 법리 검토만 하겠다’라고 한다면, ‘대학원이나 연구기관에 있을 일이지 왜 로펌에 있어요?’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업무로 지치고 힘든 건 알겠지만, 그런 태도라면 기밀이 누출되건 말건, 사건 관련 안내를 받을 의뢰인을 비서 마음대로 정하고, 발생 비용은 인심 써서 다 법인 비용으로 처리 해버 리거나, 착수금과 선수금을 흥청망청 다 써버려도 할 말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일까 싶을 때도 있다.
실제로 하나의 사건이 시작되면, 민감한 의뢰인들은 변호사들로부터 확인을 받고 사건 관련 안내를 발송한 상황에서도 메일 수신인을 한정시키거나 달리 조정해달라는 요청을 빈번하게 하곤 한다. 비용도 마찬가지다, 약정서에는 ‘부수비용은 의뢰인과 법인이 협의하여 정한다’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지방 재판 출석이 잦은 사건이라던가 공공기관에 출석을 요하는 회의가 있는 사건의 경우, 비서들은 변호사에게 비용 하나하나 청구할지 말지 확인을 받아가며(예를 들어 관련 비용을 모두 의뢰인에게 청구하는 경우 의뢰인에게 부담을 크게 주지 않으려는 변호사들은 일부러 기차나 비행기의 좌석을 가장 낮은 등급으로 예매하기도 한다.)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비용처리와 관련해 모든 증빙을 첨부해서 보내 라던가, 사건 검토를 위해 쓴 시간은 시작시간과 종료시간 모두 기재하여 청구서를 보내달라는 민감한 의뢰인도 꽤 있으니 말이다.
읽씹이건, 안읽씹이건 그 이유야 어쨌건 간에,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비용 납부 여부에 대해 확인을 요청했다. 변호사들이 자료를 검토하고 법리를 구성하고, 결과물을 의뢰인에게 보여주고 법원에 제출하는 것이 일인 것처럼, 사건 관련한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누락사항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로펌 비서인 내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날, 오후 내내 어떤 회신도 받지 못했다. 휴일을 앞둔 그날 저녁은, 협업부서가 일찍 자리를 비울 수도, 혹은 야근을 할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주니어 변호사 K에게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대신 확인을 받아 달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K는 내가 보낸 메일을 간단히 수정해 본인이 보낸 것처럼 시니어들에게 전달했고, 나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시니어 M으로부터 '빠른 사건 진행을 위해 금일 납부하시지요'라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매번 그렇듯 이상한 기분에 휩싸일 새도 없이 시니어 M의 메일을 타 부서에 전달하며 업무 요청을 하고, 결재를 올리고 납부된 비용과 관련한 청구서를 작성하고, 의뢰인에게 안내 메일을 보내고 퇴근했다. 이후 메일함에 남겨진 주니어 K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이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보였을까. 나는 결국 퇴근 후 모임에서 와인을 한 병이나 마시고 말았다.
로펌에서 비서로 일하며 나를 가장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던 말은 바로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담당 변호사로부터, 동료들로부터, 협업부서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굳이 열심히 할 필요 없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는 듯 보인 다는 것이 빈정 상하고 더러 서러울 때도 있었다. 그런 기분이 쌓이고 쌓이면, 때때로 회사를 떠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말이 계기가 되어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때로 내 업무범위가 아닌 것들을 챙기지 않은 것이 내 탓이라는 핀잔을 들으며, 반대로 어떤 일은 미리 챙겨도 어떤 피드백도 없는 일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내다 보니 저 말이 비수라기보다는 위안이 될 때도 있었다는 것은 함정이다.
아주 의외인 이야기 같지만, 변호사들 역시 회사생활엔 서툴다. 뭐 관심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회사가 아무리 열심히 비서와 스탭들의 업무영역을 구분해 둬 봤자 어떤 일을 어떤 스탭에게 시켜야 할지조차 숙지하지 못하고 그들은 지시만 쏟아낸다. 때문에 비서의 역할이 그들 지시의 적절한 분배와 적소에 전달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요청을 해결하는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일로써 얻을 보람을 생각하기보다 그 상황 안에서 덜 지치고 덜 상처 받기 위해 회사와 업무에서 나를 적절히 분리시켜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스탭이기 때문에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책임감’을 보다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될 때도 있지만, ‘넌 그 정도만 해’, ‘너한테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라고 들릴 때도 있어 속상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포장을 하고 구구절절 끄적여봤자, 인이 박혀 이제는 초탈하듯 이런 마음가짐으로 회사에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밖에 안 되는 문장의 나열일 뿐이라고 자조하는 지금이니까 말이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다. 하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법인 이 회사에서 몇 번이고 새해를 맞이하며 올해는 또 어떻게 일할 지를 고민한다. 팀장과의 면담에서 몇 년간 거듭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이제는 전의를 상실한 듯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선배를 보며 가슴이 쓰리고, 주는 만큼만 일하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말을 일삼는 비서들이 팀원들에게 실제론 태만하다는 평을 듣고, 그 태만의 피해자들이 곳곳에서 야근을 하는 것을 보며,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매번 혼란스럽다. 회사가 곧 이사를 한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건물이 바뀌거나, CI가 바뀌거나, 업무의 체계가 바뀌거나, 담당 전문가가 바뀌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몰입과 집중을 바라는 동시에 그 정도만 하라는 그들 애매한 입장이나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입장만큼 직원들을 대우해주길 바라본다. 또 누군가가 너덜할 정도로 상처받고 이곳을 도망치듯 벗어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