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따의 기억

by 신새벽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h. 나보다 선배였고 팀원들에게 알게 모르게 1인자보다 더 대우받았던 2인자. 그는 무서울 것이 없어 보였다. 모두 그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고 어떻게 하면 눈밖에 나지 않고 예쁨을 받을까 몸을 낮췄다. 처음에는 나도 소위말해 라인을 타고 싶었다. 사회생활에서 두루두루 잘 지내놓으면 손해는 아니기에. 그런데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인간관계도 있더라. 안되는걸 계속 시도해 봤자 본연의 정체성마저 잃고 그저 혼탁하고 더러워질 뿐이라는 걸 결과적으로 그를 통해 배웠다.


처음에는 일 잘한다고 소문난 h가 가진 능력과 노하우를 잘 배워야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h는 출퇴근 시간도 비교적 자유롭게 쓰고 사적인 일을 공적인 영역까지 끌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웃기게도 일단 일 잘하는 사람 타이틀이 붙으면 다수의 큰 반발을 사지 않은 이상 어느 정도는 묵인되고 그렇게 특정인에게만 관대한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사회였다. '능력이 있으면 저렇게 해도 아무 말 못 하는구나.' 그때의 나에겐 이런 불공평함도 회사에서 인정받는 선배의 당당함으로 포장되었던 거 같다.


애초에 물과 기름이었기에 섞이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한 컵 안에 있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하루는 담배를 피우러 가던 h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담배도 안 피지? 애인도 피디고 마음에 안 들어." 그러고는 후배 두세 명을 훈장처럼 뒤에 달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흡연실로 향했다. 그 뒤로도 그는 애매하게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회식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억지로 노래나 춤을 시키려 한다든가 애인과 결혼을 생각 중이라는 말에 축하는커녕 "내가 결혼 선배로서 얘기하는데 결혼은 신중하게 하는 거야."라고 이상한 충고를 날린다거나 그런 식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의 회식에서 올곧게도 h의 술, 노래, 춤 요청을 계속 거절했고 얼마 후 눈 밖에 나버리다 못해 그의 라인에서 완전히 내쳐졌다.


조용한 은따가 시작되었다.

*은따 : 은근히 따돌린다. 의 줄임말


후에 알고 보니 다른 팀원들에 비해 나만 마감기한이 빨랐다거나 회의 시간에 선배라는 위치를 내세워 모두 앞에서 무안을 주는 일도 있었다. 누가 봐도 안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업무를 받았을 때는 h라인이었던 동료도 나를 안쓰럽게 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건 네가 일을 잘 못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라고 계속해서 그가 던지고 있는 무언의 메시지 같았다. 그의 명확한 의도였던 아니던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차별과 좌절은 금방 나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중간에 그만두면 h에게 보기 좋은 뒷담화 꺼리를 주는 거 같아 그래도 하던 일까지는 끝내자는 마음으로 버티고 버텼다. 드디어 팀 프로젝트를 끝내고 마지막 회식날, 아 그놈의 회식. 단합과 격려를 빙자해 개인의 존중 따위는 없는. 요즘은 많이 변하는 추세라고 하니 mz들이여 파이팅이다! 프로젝트 내내 방관하던 팀장님이 내 옆으로 오시더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h에게 많이 배웠지?"


하.... 그 밥에 그 나물이구나.


하긴 h에게도 배우 것이 있긴 하다. 능력을 무기로 쓰는 법. 다만 잘못 쓴 무기는 늘 끔찍한 결과를 낳는 법이다. 프로젝트 이후 나는 회사를 옮겼고 h는 지금도 그곳에 있다. 이따금 듣게되는 소식은 그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