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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20. 2021

4.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순례길 4일 차 아침. 30분째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 없이 와서도 어떻게 잘 버틴다 싶었는데 점차 컨디션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늦장을 부리다 혼자 출발하게 된 아침. 이미 다른 순례자들은 대부분 길을 나섰고, 비까지 오는 바람에 지나가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마침 전날 묵었던 곳은 크기가 꽤 큰 도시 Pamplona.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묵어본 큰 도시라 혼자 마을을 벗어나 산티아고로 다시 이어지는 길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빗속에서 배낭을 메고 30분을 헤매다 다시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아, 오늘은 그냥 쉬어야 할까 고민하며 길에 덩그러니 서 있을 때, 순례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앞을 지나갔다. 그 순간 내게 그녀의 등장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주의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확실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 그간의 경험을 통해 그녀를 따라가야 한다는 촉이 왔다. 그렇게 나는 그날 그녀를 따라 걷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따라 걷다가, 그녀가 순례자 스탬프를 받기 위해 들른 대학교 교정까지 함께 들어가 스탬프를 받자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스페인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날 그렇게 우리는 동행이 되었다.


내 길잡이가 되어 준 그녀의 이름은 크루즈(Cruz). 알고 보니 역시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러 번 걸었던 경력자(?)였다. 덕분에 그날은 종일 맘을 놓고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걸었다. 함께 길을 걷다가 해바라기 밭이 나오자 멈춰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그녀가 멈춰 서면 그녀의 배낭 옆에 내 배낭을 나란히 내려놓고 앉아 햇볕에 양말을 말렸다. 그녀의 뒤에서 보폭을 맞춰 걷다 보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아침에 빗 속에서 길을 잃고 울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조금씩 길을 즐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게 별말 없이도 그녀는 내게 '어떻게 길을 찾고, 어디쯤에서 멈춰 쉬는지, 어떤 순간들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종종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가워하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렇게 종종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동행이 되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몇 번 인사를 건네다가, "안녕, 너는 어디에서 왔니? 왜 이 길을  걷고 있어?"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었다. <왜 이 길을 걷고 있냐>는 질문엔 특별한 힘이 있는지 오늘 처음 본 사람 하고도 쉽게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흙이 묻은 등산화에, 등에 진 배낭 하나, 발에 하나씩은 달고 다니는 물집.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여기까지 와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같이 고생을 하며 순례길을 걷고 있는 사람. 서로의 언어를 알지 못해도, 그것만으로도 전하려는 마음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길 위에서 하루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또 하루는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주었다. 길에서 만나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반갑게 안아주었다. 앞뒤에서 함께 걷는 누군가의 존재가 내게는 응원이고 위로였다. 혼자 걷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모두와 함께 걷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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