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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19. 2021

3. 길의 시작은 헤매는 것부터




순례길의 첫 아침은 알람 소리 없이 시작됐다. 나름대로 이른 시간에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나설 채비를 하는 다른 이들의 기척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숙소에서 출발한 건 7시 반이었지만 길을 헤매는 바람에 피레네 산맥의 초입에 들어선 건 8시가 다 되어서였다. 한국에선 유명한 산이라면 대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공식적인 입구가 있었기에, 산에 들어서는 길부터 찾아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표식은 있었으나 내가 헤맸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게 첫날 이후에도 몇 번을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헤매고 나서야 ‘전날에 다음날 아침에 나가는 길을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웠다.


마을에서 나가는 길도 못 찾는 초보에다, 전날에 내일은 어느 마을까지 갈지 정하는 게 전부인 무대책 순례자인지라, '첫날 오르게 될 산이 얼마나 높은지, 산을 오르는 중간에 화장실은 있는지, 음식을 파는 곳이 있는지' 등의 정보를 확인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여름, 겨울 한라산도 별 준비 없이 잘 올라갔다 왔으니 괜찮겠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지고 순례길의 첫 발을 떼었다. 하지만 피레네 산맥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내가 별 준비 없이 한라산을 넘을 수 있었던 건 '집 앞 마실 가듯 가벼웠던 배낭과, 산 중턱 매점에서 팔던 컵라면, 그리고 운 좋게 길에서 만난 분들이 주신 도움 덕분'이라는 . 제 아무리 한라산을 몇 번 올랐다고 해도, 7월 스페인 햇볕 아래 8kg의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두 시간쯤 걸으니 다리 아픈 건 둘째치고 어깨가 먼저 뭉쳐오기 시작했다. '꿈만 같던 곳에 지금 내가 서있다니! 그리고 그게 이렇게 힘든 꿈이었다니...!!' 아름다운 이미지로만 가득하던 상상과, 뙤약볕에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현실은 당연히 천지차이였다. 사람들이 한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을 만류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꿈꾸던 길을 걷겠다’며,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을 받으며 시작한 길. 거기다 이미 꽤 올라온 터라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 산을 넘는 수 밖에는. 그렇게 혼자 자책과 격려를 반복하며, 이젠 꿈보다 생존을 위해 다리를 움직이고 있을 때, 앞서 걷던 단발머리 7살 꼬마와 아빠를 마주쳤다.


어른도 걷기 힘든 한여름의 피레네 산 중턱을, 7살짜리 아이가 치토스를 손에 들고 그 조그만 발로 걷고 있었다. 아이가 "힘들어! 못 걷겠어~!" 칭얼거리면, 앞서 천천히 걷던 아빠가 "조금만 더 가면 돼. 쉬었다 갈까?" 하고 딸을 어르며 함께 길을 걸었다. 이 땡볕에 아이와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한 한 마음에 "올라 Hola~!"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니 아이는 쑥스러운지 빼꼼히 나를 바라본다. 이름은 노엘(Noel). 이런저런 말을 걸다 '어느 나라 사람이야?' 물으니 ‘자기는 베트남 사람이고, 아빠는 스페인 사람’ 이라며 답한다. 처음 내겐 익숙하지 않은 대답이라 당황했지만, 곧 ‘그런 가족도 있는 거구나' 깨달았다.


그렇게 얼마쯤 함께 걷다 노엘이 많이 힘들어 하자 아빠가 걸음을 멈추고 노엘을 목에 태우고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걷기도 힘든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 중턱에서. "와, 너네 아빠 진짜 멋지다! 부럽다!"라고 외치니 '헤헤' 웃으며 좋아하던 노엘. (사실 진심으로 부러웠다.) "Buen Camino 좋은 길 돼!" 인사를 하고는 멈춰 서 한동안 노엘을 목에 태운 채 걸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혼자서도 걷기 힘든 길을 아이와 함께, 게다가 산 중턱 오르막에서 목마를 태우고 걷다니. 그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내가 본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 중 하나였다. 그날, 두 사람을 바라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지친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처음 져보는 배낭의 무게, 상상 속에선 느낄 수 없던 뜨거운 햇볕, 초반의 초록빛 들판이 끝나고 계속되는 건조한 자갈길, 그렇게 녹록지 않은 ‘꿈의 현실’을 마주한 첫날. 등산 막바지에 이르러선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이 오로지 ‘얼른 숙소에 도착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걸어 내려왔다. 9시간이 걸려 숙소에 도착 후엔 뜨겁게 닳아 오른 발바닥이 식지 않아 한참을 발에 젖은 수건을 올리고 누워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에 도착해 샤워 후 도미토리 침대에 몸을 뉘이는 순간 ‘감사와 행복’이 함께 밀려왔다. 종일 짐을 지고 걸어야 했던 몸은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일상에선 느끼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해 감사함이 들었다.




<2015. 7. 15  @생장-피레네-론체스바예스>


평지가 나옴에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한 냇가에

함께 걸을 친구에

물 한 모금에 샌드위치에

푹신한 숲길에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작은 마을의 존재에

소박한 음식에

튼튼한 다리에

THANKS GOD


심플하게 살아보고 싶어 이 길에 왔노라고 말했었다. 9시간 동안 산을 넘고, 샤워하고, 입었던 옷을 빨아서 널고, 벤치에 누워 바람을 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잔디에 앉아 꽃을 바라보는 순간.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그 순간이구나.


그렇게 다시 내일을 위해 짐을 싸고, 길에서 만난 노아와 숙소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오늘 함께 걸은 친구들과 밥을 먹고, 동네를 구경하고, 잠들기 전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순례자의 음악 선물.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일기를 쓰고 잠드는 오후 10시 33분.

행복하다. 심플하다. 충만하다. 지금 이 길 위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가장 힘든 코스 중 하나인 피레네 산맥을, 말 그대로 몰라서 용감하게 넘었던 첫날. 그날 나는 길의 시작은 ‘헤매며 길 찾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라는 걸 배웠다. 내가 가진 것들과, 길에서 주어지는 것들과, 길에서 마주하는 인연들 중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음을 배웠다. 나 혼자 걷는 길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내 앞뒤에 함께 걷는 이들이 있어 끝까지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현실이 된 꿈’ 에는 상상처럼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나 자랑할만한 특별한 사건 대신, 고생과 불편이, 작은 것에 대한 감사가, 곁에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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