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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Oct 13. 2021

2. 몰라서 용감한 마음




친구들이 빌려준 배낭과 등산용품들, 중고나라에서 기적처럼 찾아낸 등산화를 신고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에 있던 시간보다 없던 시간이 많아서인지, 배낭을 메고 한 달 넘게 유럽을, 심지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떠난다는 데도 우리 가족의 배웅은 마치 등굣길을 배웅하듯 일상적이기만 했다. 배낭을 메고 공항버스를 탄 후에 파리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담담했고 떠나는 날 새벽까지 짐을 싸느라 비행기에서는 정신없이 잠들었던 것 같다.


기내식을 잘 챙겨 먹고 잘 자다 보니 어느새 파리였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구경할 새도 없이 바로 기차역으로 가서 미리 예약해두었던 바욘행 기차를 탔다. ‘산티아고를 간다!’고 들떠있기는 했지만 막상 바욘에 도착해 생장 가는 버스를 탈 때까지도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피곤이 크게 느껴졌을 뿐 별 감흥이 없었다. 다행히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도심에서 멀어지며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버스가 생장에 가까워지며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갈 때, 머리 위로 파랗게 펼쳐진 하늘과 반짝이는 나뭇잎이 보였다. 그때서야 ‘내가 진짜 산티아고 순례길에 왔구나’ 실감이 났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벅차 버스 안에서 메모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2015. 7. 14 @생장 피에 드 포트>


와. 이곳에 와 있다. 실제로 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 왜 몇 년을 꿈꾸고만 있었을까. 모든 것이 이렇겠지. 해보면 이렇게 쉽게 이룰 수 있는 걸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꿈꾸고들 있을까. 꿈이란 건 꾸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실행해 나가는 것. 언젠간 내 현실이 되는 것.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리는 건 몽상일 뿐이야. 진짜 내 꿈은 뭐였지. 다시 이뤄나가야 할 건 뭐지.

꿈은 이루라고 있는 거구나. 꿈꿀만한 곳이었구나. 너무 아름다워. 고마워.




목적지까지 가는 항공편과, 초반 며칠 묵을 숙소. 그게 보통 내가 하던 여행 준비의 전부였다. 여행 정보는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얻었고, 길은 길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물어 찾아다녔다. 준비 없이 가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해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 중에 부족한 것들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채워주었고, 덕분에 가볍게 떠나서 마음 한 가득 사람들을 채워 돌아오곤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떠날 때도 그랬다. 한국에서 생장까지 가기 위한 여행 편, 일주일 전에 벼락치기로 싼 배낭. 그게 다였다. 너무 가볍게 떠난 덕(?)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그 빈틈 덕분에 내가 계획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늘 그렇듯 돌아온 후엔 그들이 내가 기억하는 여행의 전부가 되었다.


생장행 버스를 탄 사람들은 당연히 대부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온 사람들이었고, 나는 버스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함께 내린 사람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사람들 뒤를 따라 순례자 사무소를 찾아가고 있는데 한 무리의 한국분이 앞서 걷고 있었다. ‘그냥 앞사람 따라가면 되지!’ 하고 맘 편한 척했지만 혼자 도착하고 보니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던 차라 다가가 열심히 말을 붙였다. 들과 함께 순례자 사무소에서 여권을 받고 같은 숙소에 묵게 됐다. 내가 타고 온 버스가 거의 마지막 버스였던 지 대부분의 알베르게 (순례자 전용 숙소)는 이미 모두 만원이었고, 결국 묵게 된 숙소는 예민한 인상의 주인아줌마가 환영 인사 대신 주의사항 안내로 맞이해 주는 숙소였다.


한국에서부터 거의 하루를 꼬박 걸려 생장에 도착해, 생전 처음 경험하는 ‘한 사람이 서있을 수 있는 크기'의 샤워부스에서 팔꿈치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샤워를 한 후에, 이층 침대에 침낭을 깔고 몸을 뉘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방에 누워있으니, 아주 오랜만에 수련회에 온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걸 알아보고 오지 않아서 갑자기 마주하게 된 모든 상황이 낯설고 긴장됐다. 아마 많은 걸 알아보고 왔어도 크게 다를 건 없었겠지만. 꿈이라고 이야기해오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에 와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낯선 곳에서 긴장하며 잠드는 순간마저 좋을 만큼. 내 자신이 고맙고 기특했다.


그렇게 다음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가게 된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몰라서 용감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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