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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Apr 15. 2019

후회

무딘 인생을 살아왔다는 자각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후회된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 그랬어야 하는데, 좀더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할까 말까 하다가 두려워서 하지 않고 지나간 일은 나중에 후회를 낳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이나 하고서 차였다면 차라리 깨끗이 잊을 수 있겠는데, 고백을 할까말까 하다가 안하고 지나가버리면 잊기 어렵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아래 그림을 보자. 현실이 있고 허구가 있다. 가장 왼쪽부터 읽어보자.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는 두 발이 땅에 붙어있다. 온 몸의 감각이 열려있고, 기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신화를 믿기도 하고, 돈이나 성취에 빠져들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을 허구 속에서 본다. 세월이 더욱 흐르면 허구와 실제가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의 초라한 나는 점점 지워져 간다. 현실의 감각이 무뎌진다. 죽음이 목전에 와서야 그 모든 것들이 실은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며, 현실에는 긴 세월동안 무뎌져온 나 밖에 없다는 것을 대면한다. 


밥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보면 미각이 무뎌진다. 허구에 빠져들수록 내 몸은 현실의 감각을 잃는다. 현실을 살펴보자. 현실은 고통이라 말한다. 고통은 감각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게 현실이다. 오감을 통해서 우리는 나 아닌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거기서 밀도있는 의미가 생긴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는 뜻이다.

“저는 화상께서 도가 매우 높다고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수행할 때, 공력을 들이십니까?”
“네, 공력을 들입니다.”
“어떻게 공력을 들입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곧 잠을 잡니다.”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모든 사람들도 스님처럼 공력을 들인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그것은 저와 같지 않습니다.”
“어째서 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밥 먹고 있을 때 밥을 먹지 않고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또 잠을 잘 때도 자지 않고 이런 저런 꿈을 꿉니다. 이렇기 때문에 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을때는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가 행동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행동해야만 감각할 수 있는데, 감각으로부터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관계있다. 의미는 관계에서 나온다.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있는 길을 선택하라는 조언은, 관계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고 관계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뜻이다. 실제의 세상에는 관계없는 것들은 없다. 관계없는 것처럼 묻어버리고 덮어버리려는 나의 무딘 마음만 있다. 관계있는 길, 즉 의미있는 길은 필연적으로 감각의 예민함을 필요로 한다.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있는 길을 선택하라


감각적으로 와닿는 것이 있는데 어렵거나 두렵거나 어떤 현실적인 이유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덮어두면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하는 마음이 계속 폐부를 찌른다. 감각을 닫았기 때문에 겪는 대가다. 허구를 좆느라 현실에 몸을 담그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각이 무뎌지는 방향으로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어렵지만 그래도 덤벼보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고, 그러면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으냐. 떠나고 싶다고 다 여행 떠나고, 놀고 싶다고 다 놀아버리고, 그러면 일은 언제 하고 공부는 언제 하나. 

일이든 공부든 무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반면 열린 감각으로 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느냐 무디게 덮느냐의 차이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고백을 한다고 치자. 처음에는 떨리고 부담스럽다. 그런 마음을 다 느끼고 결국에 말을 건네면, 나는 그 대가로 유능해진다. 상대를 더욱 예민하게 파악하고 더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다. 만약에 차인다고 해도 다음번에는 부담을 조금 덜 가지고 도전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통받는게 두려워 행동하지 않고 덮어두면 계속 무딘 상태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후회가 남는다. 일이나 공부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주어지는 그대로를 그저 덮고 덮고 넘기고 지나오느냐, 아니면 내가 온 몸의 감각을 열고 그것들을 마주하느냐의 태도 문제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일의 공통점은 어떤 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딘 인생을 살아왔다는 자각이다. 


인간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고 믿는 능력 덕분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 아래에 모여 대규모 협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구가 허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고통을 동반한다. 감각을 닫으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감각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돈을 버느라 가족을 등한시한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이유는 허구 속에서 살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묻어버렸던 감각을 죽음 앞에서야 돌려받으면서 느끼는 공허함이다.

만약 이야기와 실체가 구별이 잘 안된다면 그 이야기의 주체가 '고통'을 느끼는지 생각해보라. '달러'가 고통을 느끼는가? '우리민족'이 고통을 느끼는가? 
우리는 ~~주의로 규정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고, 이를통해 자신을 규정한다. 사상의 슈퍼마켓에서 이야기들을 골라담아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는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종교, 공산주의, 자유주의 등)을 개발해왔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믿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의식을 개발해왔고, 이상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의 빈틈을 매우기 위해 '희생'에 의지해왔다. '자유주의'는 우주적 드라마들을 부인하면서 '급진적인 일보를 내디졌지만 인간 존재 내부의 드라마 속으로 뒷걸음질쳤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이 중요하고 창조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 신성시됐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신화를 구축해간다. 하지만 과학이 밝혀낸 바로는, "'자유 의지'가 욕망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뜻한다면 인간에겐 아무런 자유 의지가 없다". 자유의지 신화에서 벗어나 욕망에 덜 집착해야한다.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덜 사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허구의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실체를 파악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우리 인간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고 믿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특히 우리는 허구와 실체의 차이를 아는데 서툴다." 만약 이야기와 실체가 구별이 잘 안된다면 그 이야기의 주체가 '고통'을 느끼는지 생각해보라. '달러'가 고통을 느끼는가? '우리민족'이 고통을 느끼는가?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직장을 잃으면 고통을 느끼고, 박해받은 우리 조상의 고통은 현실이었다.

"우주의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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