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또 주의
연습은 지겹다. 좀더 쉽고 빠르게 해서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남들은 쉽게쉽게 하던데 나는 왜 아무리 애써도 실력이 늘지 않을까.
피아노에 손을 얹지 않고서 피아노를 잘 치게 되는 방법은 없다. 뭔가를 할 수 있게 되려면 그것을 직접 하는게 가장 빠른 길이다.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피아노건 펜으로 푸는 수학 문제이건 다르지 않다. 무엇을 하든 잘 하기 위해서는 연습을 많이 해야한다. 많이 한다는 건 기본인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다. 아무리 애써도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연습에 반드시 필요한 건 주의 (attention)다. 흔히 주의를 의지 (will)의 문제와 혼동하여 의지가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고 하지만 주의와 의지는 별개의 문제다. 주의에 대해 설명하자. 예컨대 바람부는 들판에 나갔다고 하자. 풀내음이 바람을 타고 전해온다. 그 바람을 느낄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사소하기 때문에 아무나 하지는 않는 일이다. 사실은 실력이 느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 주의 기울이기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은 자극에 반응한다는 뜻이다. 끓는 물을 몸에 끼얹으면 사람은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자극과 반응이다. 바람을 느낄 때와 비교해 강도는 다르지만 자극과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하나하나 섬세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닌가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몸에 다섯가지 감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귀중한 능력을 예리하게 만들기보다 무디게 덮어버리고 만다.
끓는물을 끼얹는 강한 자극 말고, 약한 자극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연습을 해 보자.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여보자.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고 가만히 주변의 장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게 보인다. 주의는 특정 자극에 돋보기를 들이대어 반응하는 작업이다. 할수록 예민해진다. 바로 이러한 식으로 악기니 프로그래밍이니 글쓰기니 하는 기술을 연습한다.
연습이란 어떤 목표를 정해두고 성취를 위해 달려나가는 작업이 아니다. 내가 앉은 몸을 가만히 물 위로 띄우는 작업에 가깝다. 목표를 고정할수록 정작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에는 방해가 된다. 바람결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어떤 거창한 목표가 필요할까. 목표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된다.
“발사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나에게 충고했다.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당기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눈이 쌓이면 대나무 잎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이지요. 그러다가 일순간 잎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데도 눈이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이와 같이 발사가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최대로 활을 당긴 상태에 머물러 있으세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최대로 활이 당겨지면, 저절로 화살이 나갑니다. 발사는 사수가 의도하기도 전에, 마치 대나무 잎에 쌓인 눈처럼 사수를 떠나가야 합니다.”
-마음을 쏘다, 활. 오이겐 헤리겔
다음 그래프를 보자. Y축이 어떤 기술에 대한 실력의 양이라고 하자. 주의를 기울인다는 건 아래에서 접선으로 표현된 순간 기울기를 만드는 일이다. 함수값이 높던 낮던 기울기는 별개다. 사람은 태어나서 오감이 생생히 살아있는 어린 아이 시절에 급격하게 배운다. 그래서 모국어를 구사한다든지 하는 어려운 기술을 누구나 달성한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일상의 어느 부분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뎌진다는 뜻이다. 보통은 그 수준을 유지하면서 평생을 간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가졌던 그 생생한 주의 기울이기를 성인이 되어서도 발휘한다. 사람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예술가나 온갖 기술의 장인이 이에 해당한다. 무딘 주의를 발휘한다면 기울기가 낮고, 그러면 평생을 연습한들 높은 수준에는 닿을 수 없다.
위 그림은 1만시간의 법칙에 동반되는 의식적인 연습 (deliberate practice)에서 의식한다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악보를 그대로 따라치거나, 수학문제를 그대로 베껴서 쓰거나, 영어문장을 그대로 베껴서, 그저 복사해 옮길 뿐이라면 실력이 잘 늘지 않는다. 많은 양을 배워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고 적은 양에 주의를 기울이자. 큰 덩어리를 잘게 나누어 일일이 주의를 기울이자. 그러면 점점 사물이 자세히 보이고, 해당 기술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얻는다. 내가 억지로 의도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준이 올라간다. 내 수준을 올리겠다고 목표를 위에 꽂아놓고 억지로 기어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는 사전의 수만 어휘를 다 외운 뒤에 말문을 트지 않는다. 몇 안 되는 단어로 약간씩 다른 표현을 계속 시도한다. 이 표현과 저 표현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에 계속 주의를 기울인다. 지성보다 감각이 먼저 발달한다. 그러면 유창성 (fluency)이 어휘 (vocabulary)보다 먼저 만들어진다. 일단 유창해지고 나면, 그 유창함을 기반으로 더욱 많은 단어를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다. 어떤 기술이든 잘 하려면 연습이 필요하고, 어떤 연습이든 효과적으로 해내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배움이란 오직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것 뿐이다.
여러분은, 동시에 일어나는, '말해지고 있는 것'과 말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을 듣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것의 '전체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공간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들음'에 여러분의 '완전한 주의(whole attention)'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art)' 입니다. 대학에 가서 몇 개의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배워지는 기술이 아니고, 모든 것 - 강이 흘러가는 것, 새들, 비행기,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 - 을 들음으로써 배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서로에게 익숙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거의 그녀(아내)가 무엇을 말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여러분이 말하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10일 후에도, 10년 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들음'을 중단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 내일이 아니고 지금, 여러분이 거기에 앉아 있는 지금 - ‘들음의 기술(the art of listening)'을 배울 수 있습니까? 즉, (들음의 기술이란,) 여러분 자신의 반응들을 들으면서 깨어있는(aware) 것이고, 여러분 자신만의 리듬의 소리에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며, 그리고 또한 외부(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과정입니다. 단일의 듣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최고도의 주의'를 요하는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정말 주의하고 있을 때는, 듣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사실'과 ’사실의 진실성', ‘사실의 거짓됨'을 ’보는 것(seeing)'만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정말로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두뇌의 본질을 철저히 조사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매우 매우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강이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