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지 않고 사게 하기
공부를 잘 하고 싶다. 배우는 족족 머릿속에 들어와서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배워도 배워도 잊어버린다. 책을 보면 졸립기만 한데 참아가면서 기껏 읽은 책 내용도 덮고 나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머리가 안 좋은가보다.
이번에는 공부를 장사에 비유해보자. 옷가게를 열었다고 하자. 손님이 들렀다. 점원이 손님에게 달라붙는다. 찾는 물건이 무엇인가. 이 옷은 어떤가 저 옷은 어떤가 말을 건넨다. 손님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게 손님을 붙들려고 애쓰면 오히려 손님을 쫒아내는 결과를 맞는다.
장사가 잘 되는 집은 손님에게 뭘 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손님이 와서 스스로 사게 한다. 직원은 손님이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반응하고, 그 외에는 손님이 마음껏 둘러볼 수 있도록 놓아둔다. 손님이 둘러보는동안의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그러면 손님은 왔다가 기분이 좋으니 뭐라도 하나 집어서 나간다. 결론 (=구매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에 장기간 머무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결론이 난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은 플랫폼 장사다. 일반 사용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 그저 와서 편히 이용만 하도록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것을 기반으로 이모티콘을 팔든 광고수익을 내든 다른 판을 벌여 수익을 낸다. 손님을 최소한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므로 나중에 재방문도 한다.
손님은 결과(=구매결정)을 보면 곧 가게를 나간다. 많은 손님이 우리 가게에 와서 즐겁게 보내는 체류시간을 늘리는게 플랫폼의 목적이라면 구매를 가능하면 미루는게 가게에 좋다. 판매와 구매다. 돈과 옷을 교환한다는 의미로는 같은 뜻이지만, 판매는 옷가게의 언어이면서 구매는 소비자의 언어다. 판매는 하지 말고, 구매는 가능하면 늦게 하도록 만드는게 가게에 이득이다. 손님을 붙들려고 애쓰지 않는 장사가 더 좋은 성과를 본다.
이제 손님 (=지식)을 내 머리 (=옷가게)로 들이는 것에 비유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손님 (=지식)을 붙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쓴다. 이 손님과 저 손님과 그 다음 손님을 붙들고 있으려고 애쓴다. 나가겠다는 손님도 붙들고, 아직 안 들어온 손님도 붙들어 잡아끈다. 내가 힘을 빼는 즉시 모든 손님들이 불만투성이로 가게를 나선다. 다시는 우리 가게를 찾지 않는다.
지식이 우리가게에서 놀다가 뭐라도 하나 집어가도록 놓아두는게 플랫폼 장사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하는데 플랫폼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책을 읽는게 아니고, 책이 나를 읽게 하는게 플랫폼이다.
손님을 내 안에 즐겁게 머물도록 놓아둠으로써 때가 되면 구매결정이 일어난다 (=알게 된다). 내가 알겠다고 버둥댄다고 알아지는게 아니다. 내가 그것을 아는게 아니라, 그것이 나를 안다. 내가 판매하는게 아니라 손님이 구매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게 아니라 글이 나를 쓴다는 말이다.
내가 문제를 푸는게 아니라 문제가 나를 푼다는 말이다.
내가 악기를 연주하는게 아니라 악기가 나를 연주한다는 말이다.
나의 생각이 어떤 옷가게라고 해 보자. 손님은 새로운 지식이라고 보자. 손님을 가게에 들이고 손님이 가게를 알아서 배회하게 놔둔다. 그렇게 놓아두면 이윽고 결재를 하고 나간다. 그냥 나가더라도 적어도 불만은 없이 나간다. 손님이 가게를 빠져나가는것이 겁나 붙들려고 애를 쓰면 손님을 더욱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 붙들지 말고, 내 머릿속을 그것이 휘젓고 돌아다니게 그냥 둔다. 한 손님 한 손님을 정성을 다 하여 대접한다. 내가 손님에게 판매하는게 아니라, 손님이 물건을 구매하는 자연스러운 모양을 만든다.
그렇게 가게를 나간 손님은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온다. 장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배움에 대한 이야기다. 플랫폼이 되는 공부라고 할 수 있겠다. 단기적으로 매출을 늘리기 위한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장사가 되기 위한 공부 방법이다. 우리는 당장 판매실적을 올리느라 강박에 걸린 세일즈맨처럼 손님을 압박하느라 정신없는게 아닌가. 그러면 나는 몸이 힘들고 정작 손님은 떠나간다. 손님을 끌어들이는 방식과 지식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동일하다.
결론이 없는 상태에 머무르도록 놓아둔다.
백화점의 구조를 생각해보자. 손님이 건물 안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 동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이동하면서 가능하면 오래, 또 넓은 공간에 체류하도록 구성한다. 높은 층에 이르는 동안 낮은 층의 물건을 둘러볼 수 있도록 층별 배치되는 제품 구성도 다르게 한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머무르게 유도하는 것. 플랫폼 장사가 하는 일이다. 사장이 물건을 파는게 아니라 손님이 물건을 사게 한다.
조그만 공간 안에 갇혀 빠르게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와 달리 에스컬레이터는 개방된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층별로 이동하면서 아래층과 위층의 상품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서는 동선을 길게 만들어 상품이 눈에 잘 띄게 하는데, 에스컬레이터 역시 수직 이동의 동선을 되도록 길게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집에 들어온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