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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니스홍 May 08. 2019

책임

반응하다

취업이니 결혼이니 무겁기만 한 책임은 싫다. 내가 싫은데 그걸 왜 해야 하나. 나는 억압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 


책임이라고 하면 곧 무거운 짐이 떠오른다. 부모님이 자식을 책임지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를 책임지는 것이나, 기업이 제품의 품질을 책임진다는 식이다. 책임은 무거운 그 어떤 것인듯 하다. 책임이란 무엇일까.


책임 (responsibility)의 어원은 반응하다 (respond)이다. 

re- "back" spondere "to pledge"


누군가 책임감 있다는 말은 그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책임과 반응이 왜 같은 의미가 되는가. 무엇에 반응한다는 말인가. 

서양의 언어는 기독교적인 맥락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이 단어는 신의 부르심에 내가 응답한다 (respond)는 의미에서 왔다. 곧 신이 나에게 부여한 책임을 내가 짊어진다는 뜻이다. 책임은 일종의 약속인데, 언제 만나기로 약속한다는 식의 상호 합의가 아니라 내가 빚진 것을 되갚는다는 식의 약속이다. 신은 나에게 뭔가를 먼저 주었다. 나는 그에 응답해야 마땅하다. 


책임진다는 말이 꾼 것을 되갚는다는 뜻이면, 반대로 무책임은 꾼 것을 안 갚는다는 뜻이다. 먼저 받았는데도 되갚지 않는 것.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식이다. 나에게 음식을 제공한 음식점 주인의 요구에 내가 무반응하면 나는 무책임한 것이다. 그렇다면 받은게 없을때는 책임을 안 져도 되는것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받은게 없을 수 없다. 갓난아이가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살아있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면 나는 뭔가를 먼저 받은 셈이다. 


기린이나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걷지만 갓난아기는 타인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인간 아기만이 부모의 품에서 안전을 제공받으며 성장에 더욱 집중한다. 아기는 커서 그것에 이자를 붙여 되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인류 문명의 진보를 떠받치는 언약이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빚이고, 되갚아야 할 책임이다. 내가 이자를 쳐서 빚을 갚는다면 내가 태어나기 전과 후의 문명이 그 이자의 크기만큼 진보한다. 그래서 책임 (responsibility)의 어원은 내가 반응한다 (respond)는 뜻이다. 


원죄도 죄 이므로 이 단어를 들으면 도둑이나 강도가 짓는 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원죄라는 개념은 태초에 신의 명령을 어긴 누군가 때문에 나까지 태어날때부터 괜히 나쁜놈이라는 뜻이 아니다. 원죄란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원래 빚졌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살아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원죄가 있다. 살아있는 대가로써의 기본적인 책임이다. 원죄란 매우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발상이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에게 빚진 돈을 땅에 묻어놨다가 그대로 내놓는 종은 내쫒는다 했다. 꿨는데 이자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에 반응하지 (respond) 않았고, 그러면 무책임하며, 사회 밖으로 쫒아낼만한 이유가 된다. 삶은 무겁지만 떠받치는 그 어떤 것이다. 떠받치는데는 기본적으로 힘이 든다. 떠받치기를 관두면 자연히 무너진다. 문명을 떠받치는데는 책임이 필요하다.


책임은 나중에 내던지기 위해서 지금 짊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이미 빚진 것을 갚기 위해 짊어지는 개념이다. 그런데 일이나 공부를 대할 때의 자세는 어떤가. 하기는 싫지만 얼른 해서 없애고 싶은 그 무엇이다. 결국에 안하고 싶어서 지금 한다는 태도다. 시험문제를 푼다고 하자. 결국에 그 짐을 없애기 위해 지금 공부한다. 한편 떠받치는 공부도 있다. 웹사이트 하나를 만들고 싶어서 코딩공부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공부하는 족족 나는 내 웹사이트를 떠받치는 존재가 된다. 떠받치듯 공부한다는건 그런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과목이 의미있으려면, 그 공부를 통해 떠받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누구를 주기 위해서일수도 있고, 뭔가를 만들기 위한 것일수도 있다. 내가 책임질 일이 없는 상태에서는 공부를 해도 의미를 느낄 수 없다. 의미는 책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를 푸는데 떠받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버리기 위해 공부한다. 따라서 목적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부만 하고 책을 덮는다. 반대로 내가 읽은 그것을 받은데 대한 반응함으로 공부하면 어떨까. 한 문장을 읽었다면 그것에 반응해보자. 한 단어를 배웠다면 그것에 반응해보자. 먼저 빚진 것을 일단 떠받치고, 그래서 의미를 느끼고, 이자를 붙여서 되갚아보자. 그런 이유로 하는 공부에는 끝없이 의미가 만들어진다. 공부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받은 것에 반응하지 않는 무책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가정의 일손을 도왔다. 자기 능력이 닿는 선에서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책임에서 삶의 의미가 나오므로 책임지는 한 의미를 잃지 않는다. 공부가 의미없는 이유는 내가 받은 그것에 내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책임이 없고 교과서에, 선생님에, 학원에 책임이 있다고 간주한다. 내가 책임을 짊어져보자. 내가 반응해보자. 누구에게 어떤 빚을 어떻게 갚을지를 떠올리면서 하는 공부는 의미있다. 빠르게 배우고 싶다면, 배운 것으로 떠받쳐 올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떠올려 보자. 거기서 의미가 나오고, 그러면 빠르게 배울 수 있다.


이번에는 개인적인 범위에서 반응하다 (respond)의 뜻을 살펴보자. 자극에 대한 반응 혹은 편지를 전달한 것에 대한 답장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반응 (response)은 리액션 (reaction)과는 다르다. 어떤 자극에 대하여 무조건 일어나는 현상을 reaction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음식냄새를 맡으면 침을 흘린다는 식의 조건반사, 혹은 힘을 주면 그 반대 방향으로도 힘을 받는다는 작용-반작용의 원리 (principal of action and reaction) 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reaction이다. 당구공끼리 부딪혀 작용 반작용을 했으면, 누가 당구공을 애초에 굴렸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한편 response는 나에게 준 쪽의 근원을 고려하여 내가 반응한다는 뜻이다. 가령 나에게 편지를 준 사람이 나보다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또 얼마나 친한지를 고려하여 답장을 보낸다. respond할때는 나에게 자극이 왔다는 사실만큼이나 누가 나에게 준 것인지가 중요하다. 자극의 앞뒤 맥락을 따져서 반응하는게 response다. 개인의 범위에서 response란, 그래서 나 아닌 것에 대하여 예민하게 깨어있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생각없이 반응하면 그것은 reaction이지 resonse가 아니다.


공부 이야기로 돌아오자. 눈앞에 영어단어 혹은 수학공식이 있다. 그것에 내가 react하느냐 response하느냐에 따라 공부의 질이 달라진다. react는 무책임한 것이고, resonse는 책임있는 것이다. 예컨대 글자 그대로 베껴쓴다면 나는 react를 하는 중이지 response를 하는게 아니다. react를 해서는 어떤 영단어나 공식으로부터도 의미를 알 수 없다. 내가 책임지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단어나 수학 공식이 주는 메세지에 내가 respond한다고 생각해보자. 교과서 한줄 한줄이 어떤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내가 받은 편지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 (respond)할 것인가. 생각없이 그대로 베껴서 답장을 보낼 것인가? 그렇다면 무책임 (irresponsible)한 것이다. 반응하지 않고 반작용 했기 때문이다. 편지는 이미 받은 것이고, 그 받은것에 책임 (responsible)지려면 반응 (respond)해야 한다. 


공부를 할 때는 중요한 편지에 답장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작성해야 좋은 답장일까?

그가 어떤 상황에서 편지를 보냈는지 진지하게 파악한다. 
그가 어떤 의도로 편지를 보냈는지 진지하게 파악한다. 
내가 어떤 정보를 얹어서 답장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남의 입장을 파악하고
남의 입장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내 언어로 말해준다.

교과서를 누군가 나에게 보낸 편지라는 관점으로 읽어보자. 나는 그 편지를 읽고 어떻게 반응하여 답장을 적을 수 있을까?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는 나에게 아무런 책임을 부여하지 않는다. 책임은 나에게 시킨 그 사람이 지는 것이지 내가 지는게 아니다. 책임지지 않는 공부에는 반응할 수 없고, 반응할 수 없다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의미가 없다면 기억할수도 없다. 교과서를 일종의 편지로, 나는 이미 받은 편지에 답장한다는 식으로 공부해보자. 

내가 남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 남에게 돈을 내줘야 한다는 판결을 받는다면 누구나 억울하고 또 판결에 저항하고 싶을 것이다. 공부가 억압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받은 기억이 없는 것에 대하여 뭘 해야한다는 강요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받아서 읽은 편지에 대하여 답장을 한다는 느낌으로 공부해보자. 그렇게 공부하면 순종하게 된다. 복종하다/순종하다는 뜻의 obey는 남이 나를 억압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주의를 기울이고 (pay attention to), 잘 듣는다는 (listen to) 뜻이다.


반응하여 (respond), 책임지면 (responsible), 순종하는 (obedient)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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