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날씨가 미쳐가고 있다. 이렇게 더운 날에 밖에 있다 집에 돌아오면 진이 다 빠져버린다. 몸을 가득 채운 열기로 어지러울 지경인데, 곧바로 냉장고에서 수박 한 조각을 꺼내먹어야 한다. 입에 넣자마자 차갑게 입안을 식혀주고는 아삭아삭 씹으면 시원하고 달달한 수분이 몸에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더우면 더울수록 시원한 수박이 주는 쾌감은 더 커진다. 천국이 따로 없다.
서울에 올라온 후 첫여름에도 수박이 참 절실했다. 바닷가 도시에서 자라며 알던 더위는 바다 소금기가 섞여 끈적하게 불쾌한 더위였다. 서울의 더위는 끈적하지 않았지만 열기 그 자체로 피부가 익어가는 무서운 더위였다. 온몸이 달궈지다가 문득 쓰러지는 그런 더위.
자취방에 돌아오면 수박 한 조각이 그렇게 그리웠다. 수박 한 입 먹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수박값이 있어도 사 먹을 수가 없다. 커다란 수박을 둘 데가 없어서.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수박 한 번 먹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자취방에는 냉동실도 없는 조그만 냉장고 하나가 있었는데, 수박 한 덩이를 사다가 어떻게 잘라도 그 안에 다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번에 다 먹자니 위장이 더는 못 늘어난다며 보이콧 선언을 한다. 아쉬운 대로 카페에서 수박주스나 사 먹는 게 최선이었다. 달고 시원하지만, 역시 베어 무는 식감이 없어 아쉽고, 시럽의 도움을 받은 단 맛은 어딘가 과하다. 수박주스로는 수박에 대한 열망을 다 채워주지 못했다.
요즘은 간혹 잘라진 수박을 파는 가게도 있고, 1인용으로 개량한 듯한 작은 수박도 팔지만 그 시절엔 그랬다. 냉장고가 없으면 수박을 먹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냉장고가 있으려면 냉장고 살 돈과 냉장고가 들어갈 넓은 방이 있어야 했다.
수박 한 조각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부는 딱 그만큼이었다.
지금 그 수박을 편하게 먹을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부유해진 걸까. 운 좋게도 싸게 살고 있는 집은 낡았지만 냉장고가 들어올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는 아니지만 달리 냉장고에 저장해두는 음식이 많지 않아 수박 정도는 너끈히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