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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Sep 03. 2021

단순하게 느끼고 집요하게 성찰하기

[멘탈잡기] 감정에 잠식되지 않고 생각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다. 허리 때문에 매일 해야 하는 걷기 운동을 마치고 다음날 먹을 요구르트를 사러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의 좁은 길을 건너는 데, 직진인 줄 알았던 차가 속도도 줄이지 않고 갑자기 좌회전을 했다. 급히 피했지만 허리 때문에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차는 범퍼가 바지자락에 닿고서야 멈춰 섰다.


사고는 아니었지만 나름 급하게 몸을 비틀어 던지느라 허리 통증이 오랜만에 도졌다. 방사통인지 근육통인지 모를 찌릿한 통증은 엉덩이에서 곧바로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잠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가로등 기둥을 붙잡고 한동안 꼼짝도 않고 서있다가 천천히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누워서야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주의한 운전자에게, 부실한 몸뚱이에게, 무신경한 이 놈의 세상에. 이렇게 감정이 치솟아 오른다고 감정에만 집중하면 잠식되고 만다. 화가 나고 분하고 억울하다가 세상이 무섭고 우울해지는 감정에 빠져들면 무기력해지고 모두 놓아버리고 싶어져 버린다.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요즘은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감정의 정체와 원인과 상황과 모든 가능성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거다. 감정적인 자극이 클수록 생각을 멈추고 누군가에게 비난을 쏟거나 위로와 공감을 바라곤 한다. 그런 방식이 일시적인 만족을 줄지는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예민한 편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예민함을 증폭키기도 한다. 내 감정을 가만히 두고 관찰하면서 생각을 계속하는 편이 낫다. 짜증 나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도 끝까지 생각을 붙들고 늘어진다. 단, 실재하는 것과 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감정의 정체를 확인하기

지금 화가 나는지,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무서움인지 가만히 더듬어본다. 화가 나는데, 너무 놀라서 놀라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화인 것 같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화가 아니라 '놀람'이다. 이렇게 쉽게 다칠 수 있는 위험에 놓인다는 점을 무서워하고 있기도 하다.


원인과 책임 분석하기

-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 기본적인 원인이다. 차량이 과속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부딪히기 전에 차가 멈출 수도 있었다. 운전자 조금 부주의하긴 했지만 결정적인 잘못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운전자는 창문을 내려 괜찮은지 물어보는 확인 작업을 했다.

- 신체가 튼튼한 사람이었다면 문제 될 일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무리가 될 만한 곳을 간 것도 아니므로 내 책임을 크게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도 무리다.


더 나은 상황을 상정하기

- 운전자가 좌회전을 하기 전에 조금만 살펴보고 속도를 더 줄이거나 잠시 멈추었다면 나는 안전하게 걸어갔을 것이다.

- 운전자가 깜빡이를 켜서 좌회전할 것을 예상할 수 있게 했다면 나는 항상 그러하듯 길을 건너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 차가 근처에 접근하는 것 만으로 건너지 않고 기다렸다가 차량의 방향을 확인한 후에 길을 건넜다면 더 안전했을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부담인 만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이미 건너기 시작한 시점에 더 빨리 걷는 것은 신체적 조건상 불가능했다. 생각할 필요 없다.

- 몸이 더 튼튼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리 없는 헛된 상상이다. 이 생각이 자책을 부르고 불가능한 상황을 욕심내서 우울함에 빠지게 한다. 당장 구겨서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리자.


더 나은 상황이 되지 못한 이유

- 운전자가 보행자를 발견하지 못하였을 수 있다. 어두웠고 좁은 길이었 보행자는 사각지대에 있었을 수 있다. 초보운전이라면 운전자가 더 놀랐을 수도 있다.

- 차 앞에서 느릿느릿 걷는 보행자를 참지 못하고 겁주는 운전자일 수 있다. 드물지만 간혹 존재하며 실제로 본 적 있다.

- 운전자의 급한 사정(긴급한 가족 호출, 급설사 임박상황 등)으로 인해 정신이 나간 상태일 수 있다.  또한 그런 적이 있다.

-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대한 기대를 쉽게 하여 쉽게 길을 건넜다. 운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베스트 드라이버인 어머니가 해준 말씀을 잊지 말자. '골목길이나 인도 옆 차선에서는 길 건너던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거나, 술 취한 사람이 인도에서 뛰어들거나, 길 옆의 자전거가 느닷없이 쓰러질 것까지 예상하며 속도를 줄여라. 사망사고는 면할 수 있다.' 도로상의 모든 요소는 돌발상황을 일으킬 수 있다.


- 운전자측 사정은 '알수없음'의 영역이며 나에게 요구되는 주의수준이 매우 높아 항상 유지되기 어렵다. 특정한 원인으로 인한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다.


가장 나쁜 결과 예상해보기

- 차에 실제로 부딪혔다면 넘어지긴 했겠지만 큰 사고는 아니었을 것이다. 차량이 감속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서행 중이었다.

- 작은 사고라 하더라도 약한 허리에 충격이 가서 결정적인 손상으로 척추 유합술과 같은 수술에 이를 수도 있다. 지금 상태로도 언젠가는 해야 할 그 수술이다. 단순히 결정시기가 앞당겨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술비를 보험금으로 받을 수 있었던... 그런 건가!!!


결과 상황 다시 살펴보기

- 사고 나지 않음

- 통증이 줄어들고 집에 돌아옴

- 요구르트 못 삼


더 해야할 것이나 복구할 필요와 방법이 있는가

- No.


차근차근 생각하다 보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것 같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무사히 잘 피했고, 그러니 이제 무섭지 않다. 운전자에게 화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그럴 마음도 없어졌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어느새 다리까지 뻗었던 통증은 좀 가시고 약간의 뻐근함만 남았다. 수년간의 경험에 비춰볼 때, 신경손상은 아닌 것 같고, 근육이 조금 놀란 듯하다. 많이 놀랐던 것은 분명하고 이런 건 유튜브에서 고양이 영상이나 보면서 조금만 쉬어주면 된다.


그러고도 '애초에 내가 더 튼튼했다면...', 혹은 '세상이 나 같은 사람도 배려해야 되는 거 아니냐' 식의 비관이나 과한 기대가 그늘을 넓혀오면, 잠시 울어버리는 편이 낫다. 달라지지 않을 문제라면, 그냥 울어야지 뭐. 잠깐 울어내고, 다시 성찰해보면 된다. 바뀌지 않는 옵션들이 바뀌는 헛된 상상은 욕심이다. 충족되지 못할 욕심은 우울 속으로 빠져드는 지름길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상태와 가능한 상황 속에서 생각을 이어간다.


릴렉스엔 털찐놈 구경이 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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