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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Aug 27. 2021

불안이 엄습할 때, 퀘스트를 생각했다

[멘탈잡기] 인생은 RPG 게임처럼

2000년대 초반 라그나로크로 시작했던 내 게임 인생은 잠깐의 리니지와 WOW를 거치고는 점점 바빠진 현생을 위해 잠시 이별했다가 로스트아크와 함께 마지막을 불태웠다. 최근에 새 패치로 흥행 중인 패치 이후의 로스트아크와는 연을 맺지도 못했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어려워진 탓이다. 언젠가 허리 건강이 되살아나는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게임은 질병이고 마약이고 뭐라뭐라 나쁘다고들 말이 많지만, 어떤 마약은 잘만 쓰면 진통제가 되고 질병도 적당히 앓으면 면역력이 좋아지기도 하지 않는가. RPG 게임은 나에게 면역력 강화 효능을 발휘한 독성 있는 진통제였다.


약물의 도움으로 공황발작을 잠재우고 불안 수준을 낮추고 나서 살만해졌다 싶을 때쯤의 이야기이다. 분명 괜찮아진 것 같은데, 좋아진 것 같은데, 편하게 생각하고 아님 말고식의 태평한 자세를 아무리 연마해도 찰나의 순간 스쳐가는 '어떡하지? 큰일 났다!' 하는 작은 생각 하나가 불안을 다시 몰고 오곤 했다. 그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 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클라우스 베른하르트 저, 흐름출판 2019)라는 책이었다. 책에서 불안을 대하는 여러 방법 중에 불안한 생각의 목소리를 바꾸는 방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떡하지? 큰일 났다!'라는 생각을 할 때 스스로 아는 가장 웃긴 목소리로 바꿔보라는 거다.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연습의 효과는 상당했다. 한동안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거나 긴장될 때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 한가닥 한가닥 모두 잡아다 내가 아는 가장 웃긴 목소리로 변환시켜 다시 생각했다. 쿵쾅대려 시동 걸던 심장이 잠잠해지고 긴장되었던 근육들이 곧바로 이완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긴장되거나 걱정되거나 곤란하거나 당황스럽거나 심지어 너무 좋아 흥분되는 상황까지, 일상에서 살짝이라도 벗어나는 모든 상황 생각의 목소리를 바꾸기 시작했다. RPG 게임의 NPC 대사처럼 성우의 목소리로 생각하는 거다. 최대한 남부끄럽고 오글거리게.


"이제 곧 그들이 쳐들어 온다구.

어서 서두르게. 시간은 금이라구, 친구~"


퀘스트다. 퀘스트일 뿐이다.

이벤트다. 이벤트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면, 죄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나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일 뿐이라고 드디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상황들에 조금 더 여유 있고 관대하게 대하기도 쉬워졌다. 부분의 퀘스트는 내 레벨에서 결국 해낼수 있는 것들이고, 그게 아니라면 레벨부터 높이면 된다. 퀘스트 하나를 놓치거나 실패해도 다른 퀘스트로 만회하거나 다른 성장 루트로 방향을 돌리는 식으로 편하게 이후를 생각할 수 있다.


더 어떻게 진행할지 막막할 때는 게임상에서 낚시나 채집, 요리 같은 생활 스킬이나 올리면서 즐길 때가 있듯 그냥 생활하면서 지내보면 된다. 어차피 만렙까지는 한참 남았고, PVP에서 매번 지더라도 최종 보스를 못 잡아도 할 만한 퀘스트는 아직 많다. 




아무래도 똥망캐(운이 너무 나빠 좋은 템을 얻지 못하는 캐릭터, 또는 성장과정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더 성장해도 빛을 보기 어려운 캐릭터)라 접고 싶어지면 어떡하냐, 인생을 게임처럼 생각해 캐릭터 삭제하듯 삶을 쉽게 저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한다면 한참은 하수다. RPG는 진득하게 해야 맛인 법.


고수는 캐릭터를 삭제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단지 쉴 뿐. 인생의 다음 패치에서는 망한줄 알았던 캐릭터가 축복받은 캐릭터로 되기도 한다. 기다리기 힘들다면 부캐를 키운다. 부캐는 본캐가 모아둔 창고의 보물들을 소중히 꺼내 쓰며 무럭무럭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브런치 작가라는 세 번째 부캐 육성 중이다. 언젠가 부캐가 본캐가 되는 날을 즐겁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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