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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Nov 03. 2021

이방인이다

익숙한 것은 드물고 소중하다.

오랜만에 간 고향은 많이도 변해있었다. 갈 때마다 어딘가 변해있더니 이제는 떠나기 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 같다. 나에게 그 도시는 여전히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인데. 젊은 나의 그곳이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슬펐다. 어릴 적 첫사랑이 늙은 모습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


달라진 만큼 거리감을 느끼고 아직도 남은 옛 모습에 그리움을 느꼈다. 남은 옛 모습은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각을 되살려주기에는 모자랐다. 그렇게 나는 고향을 잃었다.


이방인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 돌아보면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에는 사람들 속에서도 조금 겉도는 편이었고 솔직하게 마음을 여는 게 늘 어려웠다.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넌 언제 훌쩍 떠나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 같아"라고 한 말에 다들 맞장구를 쳤던 건 그래서였을까.


지금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도 이제 20년 가까이 되어간다. 일 때문에 이 도시의 많은 곳을 다녔다. 하지만 추억이 남은 곳은 몇 되지 않는다. 사무실 주변 밥집들은 나름 추억이 쌓였지만 그만둔 직장이 있는 동네를 굳이 즐기며 다시 찾는 편은 못된다. 다른 곳들은 대부분 '전철 - 목적지 - 전철'의 극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다녔으니 사실상 모르는 동네다. 외근 중에 커피전문점이라도 잠시 들러보는 요령이 있었다면 좀 달라졌을까.


아직도 이곳의 많은 곳들이 나에게는 낯선 공간이다. 돌아간 고향의 공간도 낯선 공간이다. 나에게 익숙한 공간은 내 집 하나 남은 것 같다.


사람도 참 많이 만났다. 정말 사람을 많이 만나고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약해진 몸으로 집에 틀어박힌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로 친해진 사람들은 일이 없으면 멀어지게 마련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글을 쓰기도 하지만 사실 아주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이라 인상이 강할 뿐이다.


남편을 제외한 나의 대화 상대는 주로 편의점 직원과 슈퍼 주인이고 그다음이 두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 헤어디자이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 지난번처럼요'가 대화의 전부인 헤어디자이너에게 '당신이 현재 나와 세 번째로 친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 좋아할지 무서워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외롭지는 않다. 더 정확히는, 나는 외로움이 괴롭지 않고 익숙하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로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혼자 시간을 채워나가는 것에 익숙하다.


외로움보다는 생각의 멈춤이 무서웠다. 사람들과 대화할 수 없어도 TV로 혹은 인터넷으로 사람 말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말을 할 곳은 없다. 듣기만 하는 시간 속에 나를 표현할 필요도 기회도 없으니 생각조차 멈추려는 스스로를 보았다. 말을 할 때 그리고 어떤 말을 할지 말지 결정할 때 훨씬 더 많은 고민과 정리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을 멈추고서야 알게 되었다. 듣기만 하며 생각을 멈춘 나는 식물이 될 뻔했다.


그래서 글을 써야만 했다. 쓰이는 글들이 충분히 많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무수해서 내가 쓴 글들이 먼지처럼 날려가 버리더라도 나는 써야 했다. 여전히 쓰는 것 보다 읽는 게 더 재밌지만 나는 써야 했다. 글을 쓰는 동안, 그리고 그에 대한 몇 안 되는 반응들을 대하는 동안 내 생각들도 활력을 가지고 운동하기 시작했다.


낯선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탐구하며 도전하듯 접촉하는 것이 이방인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인가 보다. 편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재미있다.



언젠가부터 가을만 되면 입원하거나 몸에 칼을 대는 계절성병원증후군이 생겼다. 뾰루지 짜는 정도로 생각하고 갔던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왔는데 하필 부위가 엉덩이다. 떼어내고 보니 뾰루지인 줄 알았던 그것은 지방덩어리나 염증이 아니었다. 하긴, 뾰루지라기엔 너무 크고 단단하긴 했다. 수술부위도 그렇지만 주사를 계속해서 맞다 보니 앉아있기가 많이 아프다. 그래서 당분간 그림을 덧붙이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림 덧붙이려다 글 한편도 못쓰는 것보단 덜 답답할 것 같다. 글도 불규칙적으로 쓰게 될 것 같다. 부족함 많은 글을 매번 읽어주시는 소수정예분들께 많이 죄송하다.


이방인이라 동네 병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병원 몇 군데를 헛짚고 약국에까지 가서 물어봐가며 찾아간 병원이었는데 그마저도 수술과 관련한 검사장비 같은 것들은 부족한 작은 병원이었던지라 조만간 또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할 것 같다.  다 괜찮으니, 다른 병원 가라고 할 때는 의사가 다음으로 갈 병원을 정해주면 좋겠다. 의료법 같은 데 어긋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어느 병원이 좋을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 이 정도는 법도 좀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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