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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Nov 18. 2021

수능날을 기억한다.

수능 망쳤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찬바람이 불고 수능시험날이라며 뉴스가 이어질 때면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나의 수능날은 처참했다.


전에는 시험 치는 걸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시험시간에는 빨리 풀고 엎드려 잘 수 있으니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1교시부터 배가 아파올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배는 계속 아팠고, 식은땀까지 나는 중에 수리영역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집중력은 늘 좋은 편이었던지라 어찌어찌 다 풀긴 했는데, 답지에 마킹을 하다 실수를 했다. 답지를 교체받아 다시 마킹을 다 하고 보니 웬걸, 마지막 문제 답을 체크할 자리가 없다. 밀려 쓴 것이다. 다시 답지를 교체받아 마킹을 하다 손이 떨려와서 다시 실수, 다시 교체받아 체킹 하는데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급하게 마킹을 끝내고 시험지를 걷어가는 동안 마킹한 대로 시험지 구석에 가채점을 위해 빠르게 옮겨 적었다.


시험 전체에서 문제를 몇 개 안 틀리는 편이었다. 답지를 옮겨 적은 시험지 맨 뒷장을 놓고 채점을 하는데, 수리영역에서 갑자기 빨간 빗금이 연달아 그어졌다. 이상하다 싶어서 시험지를 펴고 다시 채점을 했다. 응? 몇 개 안 틀렸는데? 비교해보니 답을 밀려 썼다.


다시 옮겨적느라 밀린 거겠지, 제출한 답지에는 제대로 마킹했겠지, 하고 행복 회로를 열심히 돌려봤지만 나중에 받은 실제 점수는 딱 밀려 쓴 그 점수였다.


모의고사와 전혀 다른 점수를 받아버리면, 입시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와 가깝게 된다. 평소에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대학들을 새롭게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비참한 데다가 귀찮기까지 하다.


어떻게든 지원할 만한 곳을 찾아내고 나서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근처 휴대폰 대리점에 데려가 최신형 휴대폰을 사다 쥐어주셨다. 어머니는 수능 치고 돌아온 날 이후로 밤마다 자고 있는 내 방문을 열어 잘 자고 있나 확인하곤 하셨다. 그래서 맘 편히 울지도 못했지만, 그 덕에 대충 견뎌졌다.


수능을 망치면 인생이 다 무너져버린 기분이지만 내 인생은 무너지지 않았다. 적당히 지원했던 대학은 생각보다 다닐만했고 전공 공부도 재미있었다. 전공 공부가 재미있으니 수능 공부를 다시 할 생각이 없어졌다. 대학 이후로도 공부할 리나 시험들은 넘쳐났고, 어떤 것들은 학벌을 뛰어넘기도 했다.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그 대학에 합격한 사람들을 만나면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우습게, 실제 대학생 이후의 삶에서 학벌은 여러 가지 요소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너 S대 나왔어? 오오!" 하는 것과 "너 플라톤을 읽었어? 오오!" 하는 것과 "너 펜타포트 가봤어? 오오!" 하는 것이 큰 차이가 없었다. 학벌로 자랑 삼거나 위축되거나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되곤 했다. 그저 재밌는 놈이 재밌는 놈 대접받고, 기발한 놈이 기발한 놈 대접받고, 똑똑한 놈이 똑똑한 놈 대접받았다. 적어도 나를 둘러싼 대학사회와 직장 사회에서 그랬다.


좋은 대학이 좋은 이유는 사실 그 학벌 자체가 아니다. 좋은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스스로 공부하기 좋은 인프라가 많다는 게 좋은 이유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주어진 과제와 시험을 치는 게 다가 아니라서 어느 대학을 가든 스스로 어떻게 생활하고 공부하느냐에 따라 졸업할 때 얻어 나오는 것의 차이가 크다.


그러니, 오늘의 수능을 망쳤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우는 건 괜찮다. 한 달 정도는 될 대로 돼라 하고 게임이나 하면서 노는 것도 괜찮다. 다만 다 망했다며 인생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20년이 넘어서도 수능날이 쓸쓸하게 기억나는 건 그때 내 인생이 바뀌었다거나 다 망쳐버려서가 아니다. 그날의 좌절감에 내가 무너졌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만남들과 즐거움과 깨달음을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우울 속에 질식하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수능을 망쳤든 잘 쳤든, 이미 대학합격증을 받아두었든, 아니면 곧바로 취업준비 중이든, 이제 사회에 발을 내딛을 모두가 즐겁게 잘 지냈으면 한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무서워도 그 속에서 즐거움들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으며, 당신은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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