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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Oct 29. 2021

사랑으로 결혼하는 건 원래 어려운 일이다

설거지론에 겁먹지 마라

"언니는 진짜 사랑만 보고 결혼한 거잖아. 너무 부러워. 나도 그런 사람 만나고 싶어"


언젠가 퇴근하고 만난 사촌동생은 나를 로맨스 주인공 대하듯 했다. 그 말에 '언니라면 더 돈 많고 더 좋은 집안에 시집갈 줄 알았는데'라는 뜻이 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는 아주 징글징글한 그 말.


"오해하고 있는데, 조건 많이 생각하고 결혼한 거야. 결혼은 현실이니까."


라고 답한 건 진실이다. 사랑만으로 갈 수 있는 건 동거까지겠지. 결혼은 계약이고 가족이 법적으로 결합되는 일이다. 나는 정말 조건 많이 따졌다. 나에게 딱 맞는 조건을 말이다. 조건을 따지는 자는 조건의 기준이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


일상이 심심한 걸 조금도 못 견디는 나는 우선 유머 코드가 나와 잘 맞아야 했다. 유머 코드가 맞으면 싸울 일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고 힘들 때 서로 짐을 덜어줄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 유머 코드가 다르면 웃자고 한 말이 죽자고 하는 말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신랑과 나는 주변에서 한쌍의 바퀴벌레 소리를 듣는 만담 콤비로 유머 코드가 잘 맞는다. 가끔 크게 싸울 때를 빼면 대부분의 시간을 농담 따먹기를 하며 보내는데, 이게 참 즐겁다. 여행을 가면 여행지와 관련한 농담하고, 집에 뒹굴 땐 뒹굴면서 농담하고, 일이 있을 땐 일을 하면서 농담한다. 한 명이 스트레스받을 때면 어떤 농담이 먹히려나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한다. 어떻게든 내가 더 웃기려는 경쟁도 있다. 어떤 상황과 장소에서든 둘이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다.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한 조건은 독립한 인간인지였다. 나란 인간이 내 멋대로 살아버리는 편이라 상대의 가치관이 흔들거리면 파국이 예정된 인간이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독립하지 못한 사람은 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있고 별소리를 다 듣고 살 텐데, 우리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 조금 더 기준을 높여보면, 자기만의 가치관이 확실해서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더 좋았다. 그러면서도 타인에게 열려있어서 수용할 줄도 아는 사람... 이라니 나도 참 기준이 높은 편이었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는 나에게 필수조건이었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편이라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고, 약간의 애정결핍이 있으니 상대도 나를 사랑해야 했다. 그것도 독점적으로.


사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조건이 제일 어려운 조건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기적이 한 번 일어나야 하고, 하필 그때가 결혼할 수 있는 나이라는 기적이 또 있어야 한다. 어릴 때야 몰라도, 나이가 들수록 편한 마음으로 이성을 만날 기회 자체가 적어지는데 그 와중에 서로 좋아 죽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러니 적당히 괜찮겠다 싶으면 외로운 사람들끼리 결혼을 하고 차차 사랑을 더욱 키워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 좋아했고 결혼까지 한 건 사실 운도 따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 조건이 생긴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마음으로 만났든 간에 내 사람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고, 나와 함께 해주기 때문에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결국에는 정이 들고 애틋해지고 단단한 사랑이 되어 행복한 결혼이 완성될 수 있다. 이건 사실 성향의 문제라서 살면서 한쪽이 아주 잘해준다고 변하는 부분이 아니다. 성별을 불문하고 내 상대가 평소에 불평불만이 과하거나 시샘이 많다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 죽도록 좋아서 결혼해놓고도 죽여버리고 싶은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좀 간단하게 이 사람이다, 하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사촌동생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고 네 마음은 더 모르는 판에 어쩌란 거냐며 보다 간단한 판별법을 원했다. 그래서 판별법 하나를 만들어줬다.


"망해서, 아주 망했다 치자고. 구걸하거나 폐지를 줍는 것 같은 일 말고는 길이 없는 그런 상황에 처했다 치자고. 비참하겠지. 막막할 테고 말이야.

어떤 사람은 비관하면서 술이나 먹겠지, 술 살 돈이 있다면 말이야. 어떤 사람은 이게 다 너 때문이라며 긁어댈 테고.

그때, 이 놈이랑은 폐지를 주워도 재밌게 주우러 다닐 것 같다, 이 놈이랑은 구걸을 해도 내 처지가 아니라 이 인간 무릎에 먼지 묻는 게 더 마음 쓰인다 싶은 사람이면, 그리고 상대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혼해도 돼."


"언니, 나 결혼하지 말라는 거냐?"


미안하지만 나는 진짜 마지막 조건이 강력해서 결혼한 거라. 그 조건은, 내 눈에 잘생긴 사람이다. 내가 신랑이 잘생겼다고 하면 "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저러냐"며 자꾸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신들이 몰라서 그렇지 우리 신랑은 엄청 잘생겼다. 당신들은 다 틀렸고, 내 눈이 정확하다.


그래서 결혼하면 좋으냐고 물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다. 결혼은 서로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하는 계약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상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늙으신 부모님 혈압 올려가며 통보할 필요 없이 다른 사람 손 빌릴 필요 없이 서로가 책임지고 보호해줄 수 있다. 이게 진짜 결혼해서 좋은 점이다. 설거지론이니 뭐니 자꾸 집과 돈과 경제권과 사랑과... 이런 이야기뿐인데, 진짜 결혼은 서로 보호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쪽이 가정 전체를 책임지고 다른 한쪽이 요구하기만 하는 건 괴이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기도 하는 것을 나도 보았고, 알고 있다. 다만 정말로 사랑이라곤 전혀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미 내사람이 된 사람과의 사랑표현은 선택을 갈구할 때의 표현과 다른 법이라 오해를 사기 쉬울 뿐이다.

주변에서 본 많은 여성들은 남편에게 애정을 표현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부분이 채워질 때까지 애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싸움을 하는 중이기도 해서, 가려진 부분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자도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점을 상상도 못 하는 여성들도 많아서, 어머니대로부터 배워온 대로 바가지 긁고 생활을 통제하는 것으로 '챙김'이라는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런 방식이 맞고 틀리고는, 그 부부 둘만 알 수 있다. 어떤 부부는 그런 사랑이 더 끈끈하다고 느끼기도 하니까. 부디 인터넷만 믿고 결혼을 선망하지도 말고, 결혼을 비관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는 '너처럼 하면 신랑 버릇 나빠진다'거나 '여자가 월급통장을 쥐어야 쉽게 안 본다'거나 '남자는 잘해주면 딴생각한다'거나 하는 소리는 당분간 줄어들 것 같긴 하다. 아주아주 조금, 진짜 조금, 통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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