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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Jan 14. 2022

설명서를 대하는 부부의 자세

버려진 설명서를 주워 모으며

얼마 전, 작은 협탁 하나를 인터넷으로 구했다. 가구가 저렴할 수 있는 요인 중에 하나는, 직접 조립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자취하던 시절부터 적당히 조립해서 쓰는 것에는 이골이 나있기도 하고, 뚝딱뚝딱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기꺼이 직접 조립하기를 선택하는 편이다.


우리의 좁은 집구석에 적확하고도 용도가 많은 만큼 조립할 부분이 많은 협탁이 도착했을 때는 하필 허리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혼자서 조립하기에는 무리라 신랑의 도움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택배 상자 앞에 앉았다. 택배 상자를 뜯고 나무판들과 막대들, 나사 봉투와 조립용 육각렌치를 둘러보던 신랑이 대뜸 막대들을 들고 이리저리 이어 대보기 시작했다.


- 설명서 보고해. 설명서가 어디 있지?


내가 설명서를 찾자 신랑이 발로 택배 상자 사이를 헤집더니 '여, 여기 있네'하며 찾아주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벌써 나사 하나를 집어 들고 끼워넣기 시작했다.


- 아니 아니, 잠깐 있어봐. 설명서 좀 읽어보게.


- 응, 읽어. 나 먼저 하고 있을게


설명서를 보지도 않고 지금 뭐하는 짓인지, 평소에 느려 터진 인간이 이럴 때는 왜 저리 성미가 급한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까지 휘둘리진 않는다. 차근차근 설명서를 읽으며 조립 순서와 각 부품들의 방향을 확인하고 나사의 크기별 용도도 확인했다. 다시 신랑을 보니 벌써 막대 세 개나 연결해두고는 네 번째에 낑낑대는 중이었다. 설명서와 비교해보니 막대 하나의 방향이 잘못 연결되었다.


- 그거 아니야, 방향이 틀렸어.


- 잠깐, 말하지 말아 봐. 나 알 것 같아.


아니, 설명서를 읽고 설명을 해주는 데 왜 말을 하지 말라는 건지 이 인간의 머릿속에는 뭐가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신랑의 조립은 40분이 걸려서야 끝났다. 자꾸 "가르쳐주지 마"하고 가로막는 통에 나는 설명서를 다 읽고도 손도 대지 못하고 낑낑대는 걸 지켜만 보다가, 다 끝내고 나서야  어이가 없어 웃으며 놀려주었다.


- 이거 설명서대로 하면 10분이면 끝나는 거였던 거라는 거 알아? 하여튼 이상한 데서 성격 참 급해요.


- 성격이 급한 게 아니야. 난 이 협탁과의 한판 승부를 이긴 거라고. 설명서의 도움 따위 없이도 구조와 지지 원리를 이해하고 완성해낸 거지. 내가 했어!


설명서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협탁 따위와 굳이 한판 승부는 왜 하는 거란 말인가. 의기양양한 표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어떤 복잡한 전자제품을 사더라도 신랑은 설명서를 보는 법이 없었다. 그에 반해 어떤 물건이든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안심이 되는 나였다. 신랑이 버린 설명서는 늘 내가 주워다 꼼꼼히 읽고 설명서끼리 따로 모아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설명서대로 조작하거나 간단한 보수하는 건 늘 내가 더 잘했다. 설명서는 내팽개쳐둔 채 이리저리 만져보기부터 하는 신랑은 새로 들인 물건에 적응하는데 늘 시간이 더 걸리곤 했지만, 설명서에 나오지 않은 고장이나 이상한 현상에도 더 잘 대처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성격이 급해서가 아니라 물건을 대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급하다고 섣불리 판단해버린 과거를 사과한다. 설명서를 읽지 않아도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어쩌면 보다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뺏으려 든 것도 미안하다.


그래도..., 주의사항 정도는 읽어주는 게 설명서를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옆에서 읽어주면 듣기라도 해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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