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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기 Dec 24. 2021

크리스마스이브에 삼합을

의미는 만들어나가는 것

신랑과 만난 첫 해, 아직 남자 친구였던 그 겨울은 많이 바빴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해 겨울 내내 대형 일거리에 치여 12시 전에 퇴근하면 다행이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생활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날조차 새벽까지 일만 할 수는 없다.


용감하게 밖으로 나섰을 때는 벌써 10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뭐라도 해야지 싶긴 한데 서대문에서 광화문까지 갈 힘조차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사무실 바로 옆의 허름한 노포에 들어갔다. 술이나 진탕 마셔보자는 심산이었다. 뭐 먹을까 묻길래,


"모르는 집에서 시킬 때는 제일 위에 있는 메인 메뉴가 안전하지."


하고 대답했는데, 단출한 메뉴판 제일 위에는 홍어삼합이 적혀있었다.


사실 나는 처음 먹었던 홍어의 강렬한 기억에 다시는 못 먹을 음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망했다 싶었지만 수육만 조금 집어먹고 막걸리나 들이부을 심산으로 주문을 했다.


묵은지 위에 삼겹살과 홍어를 단정하게 올리고 한 번에 집어먹은 그는 곧바로 막걸리를 들이켰다. 묵은 과로를 씻어내며 '크어어~'하고 혈투 끝에 얻은 고기 뜯는 야수처럼 울부짖다 나를 보더니 맛있는데 왜 안 먹느냐고 물었다.


막걸리만 홀짝거리던 나는 어쩐지 먹는 척은 해야 될 것 같아 삼합을 조합해 젓가락으로 들었다. 손가의 긴장이 젓가락 끝까지 전해지기 전에 입에 집어넣었다. '빨리 한 두 번 해치우고 막걸리로 씻자.'


한 두 번 먹는 척하고 말려고 했는데 한두 번이 서너 번이 되고 네댓 번이 되고 열댓 번이 되었다.


"희한하네, 맛있네?"


희한하긴 뭐가 희한하냐고 어리둥절해하는 신랑에게 그제야 사실은 홍어를 못 먹노라, 그런데 오늘은 희한하게 먹다 보니 맛있다고 고백했다.


"못 먹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아니 그런데, 못 먹는데 이제는 맛있어?" 하며 낄낄거리길래 나도 어이가 없어 같이 킥킥거렸다.


- 오늘 같은 날 근사한 레스토랑도 못 가고 이런거 먹게 해서 미안해. 내가 참 분위기가 없지?

- 오늘 같은 날 난 처음으로 즐기게 된 맛이 생겼는 걸. 오늘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아.


코를 찌르는 향은 쳐져있던 기운을 코끝까지 끌어올렸고, 거친 냄새 아래로 고소하고 달큰한 육즙이 흘러 입안을 가득 채웠다. 걱정거리, 근심거리 모두 덮어버리는 압도적인 맛과 향. 그날 나의 식세계가 한 발 넓어졌고, 막걸리가 아주 달았고, 지쳤던 우리는 서로를 달랬다.


음식 하나로 기운을 차리기도 하고 음식 하나로 세상이 넓어지기도 하고 음식 하나로 서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홍어삼합을 먹곤 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는 날에 어울리지 않는 근본 없는 조합이긴 하지만, 전라도에서는 잔칫날에 홍어를 먹는다고도 하니 기독교의 잔칫날이라고 생각하면 얼추 의미를 끼워 맞출 수 있을 것도 같다. 힘들고 지친 인간들을 사랑하고 대신 희생했다는 예수님이라니 지치고 힘든 우리를 달래주었던 홍어삼합도 귀엽게 봐주시지 않을까.




브런치 식구들도, 세상의 모든 힘들고 지친 이들도, 무거운 몸과 마음을 잠시 쉴 수 있는 마음 따뜻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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