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

같이 떠나보낸 건 아닐 테지.

by lagomji
brunch_14.jpg 간질간질 벌렁벌렁 내 마음. drawing by lagom_ji




몇 년 동안 어깨와 팔꿈치 사이 길이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연 반곱슬의 머리스타일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단발로 머리를 잘랐다.

꽤 오래전부터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싶었는데 숏컷을 해보라고 주변에서 부추겼지만

아직 과감한 것 같아서 단발을 우선 해보기로 했다.


한 번은 단발로 확 잘라볼까 결심했다가 에이, 댕강 잘라놓고 후회하면 어떡해. 하고는 금방 접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긴 머리가 지루하게 느껴지고, 내가 너무 정체되어있는 기분에,

이런 결정도 쉽사리 내지 못하는 게 싫었다.

머리카락이 뭐라고. 머리카락 까짓 거 잘라서 마음에 안 들면 기르면 되지.

한량인데 밥 먹고 잘자면 알아서 잘 길 텐데. 안 그래? 하며 나는 당장에 자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단발머리를 검색해보고, 거울을 보며 어느 정도 길이가 괜찮을지 옷 속으로 넣어서 보기도 하고, 머리를 뒤로 잡아서 대략 가늠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어 친구와 함께 미용실로 달려갔다. 자리에 앉고 보니 약간은 두렵기도 했지만

미용사 분에게 이리저리 얘기를 하면서 어느 길이로 어떻게 자를지 이야기를 맞췄다.


친구는 만나서 머리 자르는 동안까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나는 머리를 자르는 순간부터는 설레고 기분이 좋아 계속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면서 가볍고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전환까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몇 년 전, 어깨 닿는 길이의 단발로 잘랐을 때가 기억났다.

어쩔 수 없이 잘라야 했고 너무 나이가 들어 보여서 다시는 이렇게 안 잘라야지. 하며 얼른 머리가 자라길

기도했었는데 그때 당시 머리를 자르면서 굉장히 기분이 묘했기에 순간 오버랩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로 외국에 다녀올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이 좋았던지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기분이 너무 묘해서 일기까지 썼다.


머리카락은 이미 그동안의 호주의 햇빛을 받아 푸석해져 버렸고, 사각사각 잘려 떨어지고 있는 걸 보자니

그마저 배어있던 마지막 호주의 추억이 완전히 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그 추억의 첫 시작이었던 전화 한 통에서부터 돌아오고 나서 뒤척이던 어느 밤까지

그 길고 긴 시간들이 머리를 자르고 나니 나를 감싸 돌고 휘몰아쳐서 나간 느낌이다.


이런 식으로 써놨는데, 다시 보니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때의 추억을 다시 회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도 한 번씩 그때를 추억할 때가 있지만 그립진 않다.

지금의 내 모습은 그때보다 많이 달라졌고, 성장해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 이렇게 변해있는데, 그들도 나처럼 변해있을까.

궁금하지만 그때의 추억을 그냥 간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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