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 6 - 밥 먹다 김치국물이 튄다면

by 강훈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누가복음 10:42)


양푼이 김치찌개는 늘 과하다.

김이 모락모락, 라면 사리까지 들어가면 국물은 더 붉어진다.

그리고 거의 끝 무렵, “한 숟갈만 더” 하는 그 순간에 반드시 사고가 일어난다.

툭, 김치국물이 점처럼 튄다. 난 정말 조심스럽게 먹어도 꼭 흘리거나 튄다.

혼자 먹을 땐 몰랐다가, 누군가 “여기 살짝 묻었어요” 하고 알려주는 순간부터 밥맛이 접힌다.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고, 마음은 그 작은 점을 확대해서 들고 다닌다.

식탁의 중심이 음식도 사람도 아닌 얼룩으로 바뀐다.


심리학은 이 장면을 “스포트라이트 효과”라고 부른다.

우리는 모두가 나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각자의 무대 조명을 감당하느라 남의 옷깃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세상이 나에게 덜 집중해 있다는 사실은, 나를 가볍게 만든다.

나만큼 나를 보지 않는 그들의 시선이, 오히려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신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분주함 한가운데서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다(누가복음 10:42).

좋은 편은 얼룩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지금 이 만남을 놓치지 않는 마음이다.

마르다는 주방에서 일하면서 마리아가 돕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요리하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식탁에서는 사람이 우선이고, 그다음이 음식이고, 옷은 더 뒤다.

주님 앞에서 자유한 사람은 체면의 끈을 조금 늦추고,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예배처럼 받는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옷의 얼룩은 세탁으로 지워지지만, 마음의 얼룩은 종종 두려움이 남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나”(잠언 29:25).


우리는 ‘저들이 뭐라고 생각할까’를 하나님보다 더 큰 심판대처럼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사무엘상 16:7).


그분의 시선이 나를 규정한다면, 셔츠의 점 하나가 오늘의 기쁨을 빼앗아 갈 이유가 없다.

들의 백합을 입히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입었는가 보다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물으신다(마태복음 6:28-30).


부끄러움은 늘 식탁에 함께 앉으려 한다.


“망쳤다, 다들 봤을 거야.”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고백한다.


괜찮아. 나는 이미 사랑받는 자야.


이 고백은 무례한 태연함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품위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서로의 어색함을 웃음으로 덮고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다.

얼룩을 문지르는 손을 내려놓고, 눈을 들어 상대의 얼굴을 본다.

나를 보시는 분의 시선으로, 내 앞의 사람을 본다.


생각해 보면 김치국물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옷에 왔다가,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곧 사라질 점이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대개 내 마음의 고집이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흠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불안.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보다 함께 앉아 있음을 기뻐하신다.

흠 없는 셔츠가 아니라, 감사로 채워진 자리를 원하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좋은 편을 택하고 싶다.

얼룩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람을 중심에,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그러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식탁의 작은 자유가 하루의 공기를 바꿔 놓는다.

내 행복은 흰 셔츠의 완벽함이 아니라, 조금 묻어도 괜찮다는 은혜의 여유에서 시작된다.

국물이 한 방울 튀면 이렇게 미소 짓는다.


“괜찮아요. 저는 안 보여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더한다.

지금은 당신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를 보시는 주님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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