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마음을 살피시나니.”(사무엘상 16:7)
어떤 날은 스마트폰 화면에 뜬 한 줄이 하루의 불을 꺼 버린다.
“실망이에요.”
말은 짧은데 마음은 길게 흔들린다. 가슴이 한 번 내려앉고, 그 말이 내 안에서 자꾸만 불어나 나를 삼킬 것만 같다.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칭찬 열 줄보다 상처 한 줄이 오래 들리는 건, 우리가 유난해서가 아니라 아팠기 때문에 그렇다.
그럴 때 나는 먼저 말 대신 침묵을 꺼내 든다. 부엌등 하나만 켜 두고 의자에 앉아, 속으로 아주 짧게만 고백한다. 주님, 저는 지금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비난의 문장이 조금 작아진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들으셨기 때문일 거다.
“주님은 내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내 혀의 말이 내 혀에 오르기 전부터 다 아시나이다”(시편 139:2,4).
설명하기 전에 이미 아시는 분이 계신다. 그 사실 하나가 마음의 바닥을 지켜 준다.
비난에는 모양이 많다. 거울처럼 정직하게 나를 비추는 말이 있고, 칼처럼 날 선 말도 있다. 그러나 모양이 달라도 한 가지는 같다. 하나님은 겉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사무엘상 16:7). 그분의 시선 아래에 있을 때, 나는 내 존재를 낙인과 바꾸지 않게 된다. 그제야 마음속에 작은 분별이 따라온다. 거울 같던 말은 조용히 씨앗이 되고, 칼 같던 말은 바람에 흩어질 먼지가 된다. 씨앗은 품으면 자라고, 먼지는 털어내면 사라진다. 어느 쪽이든 내가 급히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 있다.
물론 억울한 자리에 침묵이 늘 옳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밤에는 맡김이 침묵의 다른 이름이 된다. 예수께서 모욕과 거짓 앞에서 많은 말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듯이, “자기를 심판하시는 이에게 맡기셨다”(베드로전서 2:23). 그 믿음의 침묵을 통과해 아침을 맞으면, 어젯밤의 매듭이 조금 덜 얽혀 있는 걸 보곤 한다. 내가 논리를 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밤새 마음을 만지셨기 때문이다.
비난은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속삭이며 존재를 통째로 깎아내리려 든다. 그때 나는 더 큰 목소리를 기억한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이 음성이 먼저 들리면, 나는 도망치지 않고 조용히 내 몫을 바라보게 된다. 잘못이 있었다면 “미안합니다”라는 한 마디가 자연히 입술에 오른다. 잘못이 없었다면 침묵이 끝나고 평안이 남는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살짝 기울어지는 것, 그게 회복의 시작이다.
우리는 서로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때로 거칠고, 우리의 마음은 때로 얇다. 그 얇은 마음을 들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건 결국 하나님의 시선뿐이다. 그 시선에 자신을 세워 두면, 비난이 크게 들려도 나는 작아지지 않는다. 고칠 것은 고치고, 거를 것은 거르고, 나머지는 주께 맡길 수 있다.
오늘도 누군가의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면, 결론을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 단지 이 한 줄만 마음에 얹어 보자. 주님, 제 중심을 아시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그 고백이 잠깐의 숨처럼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비난이 지나간 자리에는 결국 사람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남는다. 그 손이 오늘도 우리의 중심을 쓰다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