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만날 사람이 70억이나 남아 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배신은 늘 가까운 자리에서 온다. 함께 웃던 테이블, 같은 비밀을 나눴던 밤, 서로의 약점을 맡겼던 손끝. 그 자리에 빈 의자가 생기면 마음은 오래 울린다. “왜 그랬을까.” 대답을 붙들고 씨름하지만, 어떤 밤은 대답이 없어 더 아프다. 이상하게도 칭찬 열 줄보다 상처 한 줄이 더 크게 들린다.
심리학자 로이 보마이스터는 사람 마음이 나쁜 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상처는 오래 남고, 친절은 빨리 사라진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가진 편향일 뿐이다. 그러니 먼저, 이렇게 마음을 토닥여 주고 싶다. 당신이 유난히 약해서가 아니라, 아팠기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오래 머물 필요는 없다. 예수님도 가까운 이로부터 입맞춤의 배신을 받으셨다(마태복음 26:48–50). 그 밤에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떠난 이를 붙잡지 않으시되, 무너진 이를 다시 불러일으키셨다. 새벽 바닷가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베드로를 다시 관계로 초대하셨다(요한복음 21:15–17). 배신의 이야기는 늘 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손에 들리면 다음 장이 된다.
“나에겐 만날 사람이 70억이나 남아 있다.”
이 문장은 억지로 씩씩해지려는 주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의 상처보다 넓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고백이다. 우연히 마주친 한 사람의 친절이 한 계절을 바꾸고, 일 때문에 시작한 인연이 기도 제목을 나누는 동행이 되곤 한다. 오래된 관계가 모두 깊어지는 건 아니고, 처음인 관계가 금방 깊어질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이 좁아졌을 때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것뿐, 하나님이 펼쳐 놓으신 자리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넓다.
물론 떠난 이들을 한 번에 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흘려보내는 기도를 배운다. 주님, 그 사람을 축복합니다. 제가 쥐고 있는 설명과 억울함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 기도는 정의를 포기하는 체념이 아니라, 심판대에서 물러나는 믿음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19).
그 자리를 비워 둘 때, 놀랍게도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숫자로 셈이 되지 않는 사람들, 그건 바로 밥을 함께 먹고, 사소한 농담으로 마음을 녹이고,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서로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
때로는 떠난 이유가 나에게도 있다. 그 사실을 보게 될 만큼 마음이 잦아들면, 상처는 서서히 배움이 된다. “다음에는 이렇게 사랑해야겠다.” 그 배움이 나를 더 미소 짓는 사람, 더 오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상처를 미화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 상처가 길을 막지 않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너는 내 것”이라는 선포가 중심에 자리할 때, 어떤 사람의 떠남도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이사야 43:1).
어떤 저녁에는 숫자를 셀 필요도 없다. 70억이라는 거대한 수보다 더 중요한 건 한 사람이다. 오늘 우연히 스친 사람,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 화면 속 이름 하나. 그 한 사람에게 정직한 미소 하나를 건네며, 우리는 다시 관계의 길 위에 선다. 세상은 여전히 넓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혹시 지금도 가슴에 매듭이 남아 있다면, 오늘은 결론을 미루어도 좋다. 다만 이 한 줄만 꼭 붙잡고 잠들자. 내 이름을 아시는 분이, 내 사람도 예비하신다. 그러니 배신 앞에서도 세상을 닫지 말자. 닫힌 문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다음 문을 바라보자. 그 문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이사야 41:10).
그리고 그 음성에 대답하는 사이, 우리는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정말로, 나에겐 만날 사람이 아직도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