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의 도모는 깊은 물 같으나 명철한 자는 그것을 길어 올리느니라.”(잠언 20:5)
불을 끄고 누우면 낮에 만난 얼굴들이 물결처럼 올라온다. 오늘은 유독 한 사람이 오래 남았다. 함께 있을 때 그는 말이 적었고, 큰 소리의 사람들 옆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나는 수면만 보고 서둘러 판단을 내렸다. 소극적, 주눅 듦. 그런데 단둘이 마주 앉자, 전혀 다른 깊이가 반짝였다. 또렷한 비전, 멀리 보는 그림, 단단한 욕심.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깊은 물을 내려다보고도 두레박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겸손을 약함이라 읽고, 조심스러움을 무기력으로 오해했다는 것을.
사람은 한 면만 보여 주지 않는다. 빛이 각도에 따라 달라지듯, 관계의 각도에 따라 결이 달라진다. 가족 사이의 침묵이 소심함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자리를 아끼는 방식일지 모른다. 큰 목소리는 분노가 아니라 열정, 빠른 처리는 경솔이 아니라 책임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남의 행동을 성격으로 고정해 버린다(심리학이 ‘기본적 귀인 오류’라 부르는 바로 그것). 오늘의 나는 그 오류의 좋은 사례였다.
주님께서는 천천히 하는 법을 가르친다. 주님은 사람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지 않고, 이야기로 보셨다. 삭개오를 직업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셨고(눅 19:5), 우물가 여인을 평판이 아니라 목마름으로 보셨다(요 4장). 그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는 말씀은, 수면의 잔무늬보다 깊은 물결을 보라는 초대다. 급히 판정을 내리는 대신, 길어 올리는 시간을 갖는 것.
돌아보면, 내가 붙인 많은 이름표들은 사실 나의 불안이었다. 빨리 결론을 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성급함, 내 방식과 다른 리듬 앞에서 느끼는 조바심. 그래서 사람을 ‘내가 아는 세계’에 억지로 수납했다. 하지만 사람은 서랍이 아니라 문에 가깝다. 열어 보아야 보이고, 들어가 보아야 알게 된다. 한 번 더 만나 보고, 질문을 더 건네고, 상대의 침묵을 한 번 더 기다릴 때, 우리는 비로소 물 위가 아니라 물 아래의 진짜 색을 본다.
이 시선은 결국 나에게도 돌아온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코만 오래 보면 코만 더 커 보이고, 귀만 들여다보면 귀만 유독 도드라 보인다. 한 부분이 전부가 되어 버리는 착시. 사람도 그렇다. 어제의 실수로 오늘의 사람을, 한 장면의 어색함으로 평생의 성품을 재단하지 않기로 하는 것. 우리는 그렇게 결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삼상 16:7)을 기억한다면, 나도 최소한 부분을 전체로 만들지 않는 겸손쯤은 배울 수 있다.
낮에 만난 그 후배는 아마 전에도 같은 사람이었다. 달라진 건 그가 아니라 내가 선 자리였다. 소란스러운 식탁이 아니라 조용한 테이블, 많은 눈빛이 아니라 내 눈빛 하나. 그 자리에서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 아니라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제 눈을 고쳐 주소서. 먼저 단정하지 않고, 먼저 듣게 하소서.
사람을 볼 줄 안다는 건, 정확한 판정의 기술이 아니다.
첫인상을 메모가 아닌 연필로 적는 습관,
사연을 듣기 전 대답을 늦추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시간이다.
불을 끄기 전 마지막 한 줄을 중얼거린다.
내가 보는 것보다, 주께서 보시는 것이 더 크다.
그 겸손이 내일의 만남을 바꿀 것이다. 누군가의 침묵을 다르게 듣고, 누군가의 성급함을 다르게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람은 내 판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직 쓰고 계신 문장일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