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9 - 자기 연민 말고 자비

by 강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재판정이 된다.
컴퓨터를 닫고 불을 끄면, 그제야 낮의 장면들이 증거물처럼 떠오른다. 대화 중에 던진 서투른 한마디, 마감 직전에 한 실수, 괜히 미뤄 둔 일. 그리고 판사는 늘 내 편이 아니다.

“넌 왜 늘 이 모양이니.”

“다시 시작해 봐야 뻔하지.”

배심원도, 검사도, 모두가 한 목소리다. 그 순간 내가 하는 일은 회개가 아니라 자기 연민이다. 스스로를 웅크리게 만드는, 묘하게 달콤한 연민. 거기에 오래 머물면 이상하게도 다음 날 힘이 빠진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는 말한다. 자기 연민은 웅덩이에 빠져드는 것이고, 자기 자비는 웅덩이 옆에 무릎 꿇고 자기 손을 잡아 일으키는 일이라고. 말하자면, “괜찮아, 아무 의미 없어”라고 달래며 현실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그래, 오늘은 넘어졌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넘어질 수도 있어 당연하게. 다시 일어나 보자”라고 조용히 등을 쓸어 주는 태도다. 놀라운 건, 이 자비가 변명을 키우는 게 아니라 용기를 키운다는 사실이다. 정죄는 사람을 숨게 하지만, 친절은 사람을 돌아서게 만든다. 성경은 그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회개로 이끈다”(로마서 2:4)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흠을 모르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아셔서 우리를 정죄부터 하지 않으신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이 구절은 우리를 작게 만들려는 선언이 아니라, 작기 때문에 더욱 품으시는 마음의 고백이다. 우리는 먼지처럼 흩어지기 쉬운 존재 - 그래서 아침마다 자비가 새롭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3).

그 자비를 믿는 사람은 밤의 재판을 파하고, 아침의 시작으로 넘어간다.


나도 어느 날 그런 전환을 배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귓속엔 내 목소리만 울렸다.

“오늘도 네가 망쳤어.”

그때 문득 떠올랐다. 만약 오늘 같은 실수를 친구가 했다면, 나는 뭐라고 말했을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너, 오늘 여기까지 왔잖아. 내일은 한 번 더 시도해 보자.”

나는 내게 그 말을 건네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그 말을 나 자신에게 해봤다. 이상하게도 숨이 조금 트였다. 변명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책상에 다시 앉았다. 달라진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목소리의 톤이었다.


신앙 안에서의 자존감은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라는 주문에서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연약하다 - 그렇지만 사랑받는다.” 여기에서 자란다. 십자가는 우리의 잘못을 축소하지도, 우리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진실을 직면하게 하고, 사랑으로 일으킨다. 그러니 자기 자비는 대충 넘어가자는 신호가 아니다. 하나님께 배우는 하루치의 친절이다. 사실을 흐리지 않고, 그렇다고 존재를 깎지 않는, 그 미세한 온도. 그 온도가 다음 걸음을 만든다.


오늘 밤, 마음속 재판이 열리려 할 때 이렇게 해 보자 - 지침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로.
한 호흡만 깊게 들이마시고, 속으로 짧게 속삭인다.
“하나님, 저는 먼지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오늘의 잘못은 인정하되, 내일을 향한 용기를 허락해 주세요.”
그 한 줄의 기도가 자기 연민의 웅덩이를 지나 자기 자비의 다리로 우리를 옮겨 준다.

우리는 매일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매일 일어날 수 있다.

자기 연민은 잠깐 달콤하지만 발을 묶고, 자기 자비는 조용하지만 발을 내딛게 한다.
자존감은 그 한 걸음, 그 자비의 톤에서 자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작은 걸음을 은밀히 보시고 기억하신다(마태복음 6:4).
그러니 오늘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인사하자.
“수고했다. 이제 다 됐다가 아니라, 다시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