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31)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우리 문화가 아이에게 가장 일찍 가르치는 가짜 양자택일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만들고, 고른 쪽은 잠깐 뿌듯해하고, 다른 쪽은 장난으로 삐진 표정을 짓는다. 모두 웃지만, 마음 한쪽엔 이상한 습관이 남는다. 세상은 늘 편을 요구하고, 사랑에도 서열이 있다는 습관.
어느 날 아이가 비슷한 질문을 내게 되물었다.
“아빠, 그럼 아빠는 누구를 제일 사랑해?”
나는 잠깐 멈췄다가 이렇게 답했다.
“아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너희를 사랑하고, 또 아빠 자신도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어.”
아이에게 덧붙였다. “너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엄마냐 아빠냐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네가 너를 존중하고 사랑하면 좋겠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 길을 가리켰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웃 사랑의 척도가 곧 자기 사랑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에게 “다른 이를 제대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무리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도 <사랑의 기술>에서 말했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뿌리에서 자라고, 하나를 미워하면 다른 하나도 병든다고.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의 "자기 자비(self-compassion)" 연구는,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타인에게도 더 따뜻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애착이론의 존 볼비(John Bowlby) 역시 안전한 애착을 경험한 아이가 타자에게 안정적으로 다가간다고 말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자기 존재를 받아들일수록, 사랑은 밖으로 흘러간다.
문제는 고정관념이다. ‘자기를 사랑하면 이기적’이라는 오해. 하지만 "자기애(self-love)"와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은 다르다. 전자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선물로 수납하는 일이고, 후자는 나를 우상으로 중심에 세우는 일이다. 하나는 겸손을 낳고, 다른 하나는 비교와 경쟁을 낳는다. 자기 사랑은 “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 4:19) 가능해진다.
생각해 보면, “엄마 vs 아빠” 질문은 어른들의 세계에도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성과 vs 사람”, “진리 vs 사랑”, “나 vs 우리”. 우리는 자주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자주 "둘 다/그리고(both/and)"다.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며 성과를 만든다. 뿌리를 버리지 않고 열매를 구한다. 하나님이 주신 관계들은 제로섬이 아니다. 사랑은 나누면 줄어드는 케이크가 아니라, 나눌수록 커지는 반죽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연습시켰다.
“이 세상에서 누굴 제일 사랑해?”
“나.”
“그다음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가족과 친구들.”
자기 자신을 1번으로 부르는 훈련은 서열놀이가 아니라 책임의 선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로서 나를 돌볼 책임이 있어요.” 그렇게 자신을 존중하는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도 존중의 언어를 배운다. 사랑받은 방식으로 사랑하게 되니까.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관계를 '나-너(I–Thou)'와 '나-그것(I–It)'으로 구분했다. 상대를 선택의 대상이 아닌 만남의 너로 볼 때, 사랑은 서열이 아니라 현존이 된다. 누가 더 좋은가를 묻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누구와 진실하게 만나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 질문이 고정관념을 푼다.
이제 질문을 바꾸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대신
“오늘 너를 어떻게 사랑했니? 그 사랑으로 누굴 조금 더 따뜻하게 했니?”
아이도, 우리도 천천히 배워 간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몸과 마음을 돌보고, 그 힘으로 곁을 돌보는 법을.
결국 사랑은 줄 세우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해, 나를 통과해, 이웃에게 흘러가는 순환이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게, 오늘도 먼저 그 사랑 안에 잠깐 머문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우린 누구 편도 아니야. 우린 사랑 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