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편 27:10)
주민센터에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다가, ‘부’와 ‘모’ 칸 사이로 바람이 스친다. 학교 가정통신문은 늘 “학부모님께”로 시작하고, 아이들 설문지는 ‘부/모 직업’ 칸을 비워두면 왠지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서류의 칸은 네모반듯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의 삶을 부모의 혼인 상태로 요약해 버린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로 시작하는 기사 문장이, 마치 운명처럼 다음 문장을 유도한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부모의 이야기가 내 정체성의 마지막 문장일 수는 없다.
성경은 “네가 누구의 아들이냐?”보다 “네가 누구의 사랑을 받느냐?”를 묻는다. 시편 기자는 부모의 빈자리 한가운데서도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신다”고 고백했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관계의 은총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먼저 “내 것”(사 43:1)이라 이름 부르셨다는 사실이, 어떤 가정사의 굴곡보다 앞선다.
물론 상처는 현실이다. 이혼 가정의 아이가 겪는 불안과 불편을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심리학은 그것을 "역경 점수(AC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로 측정해 왔다. 그러나 같은 연구들은 동시에 말한다. 위험은 ‘규정’이 아니라 ‘확률’이고, 결정타는 아니다. 회복탄력성 연구의 권위자인 앤 매스턴(Ann S. Masten)은 이를 “평범한 기적(ordinary magic)”이라 불렀다. 특별한 처방이 아니라, 안전한 관계, 의미 있는 일, 작은 성공경험 같은 일상의 자원이 아이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 인생의 성적표에 부모의 이혼이 빨간 줄 하나를 그어 둘 수는 있지만, 그 줄이 내 이름을 지우지는 못한다.
철학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존재”라 했다. 우리는 과거를 기록된 운명이 아니라 해석되는 이야기로 산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사건을 “내 인생이 망가진 날”로만 말할 수도 있고, “내가 사랑의 본질을 더 깊이 묻기 시작한 날”로 다시 말할 수도 있다. 이야기를 새로 엮는 주도권이 조금씩 내게 넘어오는 순간, 고정관념은 힘을 잃는다.
믿음은 그 주도권을 더 단단하게 쥐게 한다. 예배 때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엡 4:22-24). 가정사가 어떠하든, 세례의 물은 새로운 가족 서사를 열어 준다. 교회가 진짜 가족이 되어 줄 때가 있다. 누군가 예배 뒤에 건네는 “수고했어, 이번 주도 잘 버텼네”라는 한마디가, ACE 점수보다 강력한 보호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결격사유를 지워 주는 절차가 아니라, 결격이라는 단어 자체를 무력화하는 현실이다.
그래도 마음은 자꾸 불려 나온다. “내가 이 모양인 건….” 그 문장을 끝내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심리학자 줄리안 로터(Julian Rotter)의 "통제의 위치(locus of control)" 개념이 도움이 된다. 바깥에서만 원인을 찾는 마음은 내 삶을 수동태로 밀어 넣는다. 신앙은 여기에 한마디를 더 얹는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 하셨으니, 이제 나는 나에게 주신 오늘을 책임진다.” 바깥 탓을 멈추는 일은 죄책에 잠기자는 뜻이 아니다. 은혜의 주어를 붙잡고, 책임의 동사를 선택하자는 뜻이다.
나는 종종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내 과거를 바꾸실 수는 없어도, 내 과거가 나를 부르는 이름을 바꿔 주세요.”
‘결핍’이 부르던 이름을 ‘갈망’으로, ‘수치’가 붙여 놓은 꼬리표를 ‘갈증’으로 고쳐 부르면, 그 갈증은 사람을 망치지 않고 기도가 된다. 프롬(Erich Fromm)의 말처럼 성숙한 사랑은 의지이고, 의지는 훈련된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연습, 내 안의 아이에게 친절을 건네는 연습(크리스틴 네프, Kristin Neff의 자기 자비), 신뢰할 만한 어른과 정기적으로 이야기 나누는 연습, 이런 소소한 습관들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체념을 조용히 허문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불러 세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도 좋다.
“네, 우리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하지만 그 사실은 내 결격사유가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사랑을 더 배우게 된 배경이에요.”
이건 자기기만이 아니다. 선택지다. “상처 → 낙인”으로 이어지는 고정관념의 화살표를, “상처 → 배움 → 책임 → 사랑”으로 다시 그리는 선택. 복음은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서류의 칸에는 여전히 ‘부/모’가 필요하겠지만, 마음의 칸은 이렇게 바꿔 두고 싶다.
부모의 상태: 여러 사연이 있음.
나의 상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오늘을 선택하는 자.
결격은 기록에 붙는 말이지, 사람에게 붙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영접하셨다. 그러니 오늘도 영접된 사람답게 걸어가면 된다. 당신의 가정사는 배경이고, 당신의 정체성은 부르심이다. 그 순서를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