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9 - 끝까지 하는 법

by 강훈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처음은 언제나 화려하다. 새 다이어리의 첫 장, 새 운동화의 첫걸음, 말씀 통독의 첫날. 시작은 음악의 전주처럼 우리를 들뜨게 한다. 그런데 노래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전주가 아니라 끝까지 가는 멜로디다. 성장도 그렇다. 결단은 당장 번뜩이듯 될 수 있지만 성장은 지속을 통해 도달한다.


몇 해 전, 아이들과 베란다에 작은 화분을 놓고 허브를 심었다. 첫날은 사진도 찍고 “허브 잘 길러서 아빠가 맛있는 요리 해줄게.” 큰소리쳤다. 일주일쯤 지나자 흙은 갈라지고, 물뿌리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기 어려웠다. 어느 저녁, 말라버린 잎을 보다가 마음이 툭 꺾였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씨앗이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머물지 못한 것이었다.

그날부터 물뿌리개를 베란다 문턱에 두었다. 발에 걸려서라도 물을 줄 수 있도록. 한 달 뒤, 아이들은 바질 잎을 따서 파스타 위에 올렸다. 사진은 첫날이 더 근사했지만, 맛은 지속된 보살핌이 만든 선물이었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한순간의 광채보다 오래 견디는 사랑을 좋아하신다. 시편은 “아침마다”(시 90:14)를 노래하고, 예수님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셨다(눅 9:23).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그걸 “같은 방향으로의 긴 순종”이라 불렀다. 번쩍이는 체험보다 작은 성실이 쌓여 만드는 방향성, 그게 믿음의 근육을 붙인다.


심리학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은 큰 결심으로 움직이기보다, 마찰이 낮은 길로 흘러간다. 그래서 ‘꾸준함’은 의지의 승부라기보다 설계의 승부다. 말씀을 가까이하려면 성경을 눈에 보이는 자리로 옮겨 놓고, 기도를 이어가려면 기도할 시간을 하루의 같은 시간과 장소에 못질하듯 박아 둔다. “하면 좋지”가 아니라 “이때, 여기에서, 이렇게”로 구체화할 때 발이 먼저 움직인다.

철학이 말하듯 습관은 인간을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 기대는 습관이 우리를 다시 만든다. 물론, 끝까지 가는 길엔 흔들림이 넘친다. 지쳐서 주저앉을 때가 있고, 스스로 미워질 때가 있다. 그때 필요한 건 자기 책망이 아니라 복음의 질서다. “나는 연약하다”에서 멈추지 말고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로 건너뛴다. 실패를 증거물로 들고 주님께 나아가 “다시 묶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성경의 약속은 분명하다. 넘어지는 횟수가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일으키시는 손이 우리를 규정한다(잠 24:16). 끝까지의 힘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주고받음에서 온다. 나의 조급함과 번아웃을 주님께 올려 드리고, 그분의 호흡을 내게로 가져오는 것. 그래서 성장의 기도는 장황할 필요가 없다. “주님, 오늘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짧은 이 고백을 하루에 몇 번이고 되뇌면, 마음의 나침반이 미세하게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작은 실습 하나를 해보자. 넘어가는 문턱을 바꿔 보자. 말씀 읽기를 미루는 사람이라면 성경 앱을 첫 화면 맨 앞줄로 옮겨 둔다. 기도가 막막한 상황이라면 잠들기 전 불을 끄고 한 문장만 기도하고 눈을 감는다. “오늘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혹은 “놓친 것들을 용서해 주세요.” 대단한 전술이 아니라 작은 문턱의 조정이 흐름을 만든다. 물뿌리개를 문턱에 두면, 물은 다시 흐른다. 결국 성장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지속의 문제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은 빨리 감기가 없고, 대신 씨와 계절이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흙 아래서 조용히 확장될 때, 어느 날 줄기는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러니 낙심이 문턱을 넘을 때 갈라디아서의 약속을 붙든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리라. 오늘도 시작보다 끝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시작은 내 결심이 만들지만, 끝은 그분의 신실하심이 데려다준다. 내가 해야 할 몫은 한 가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