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빚이 글쓰기의 빛이 될 때

만년 읽기 지망생의 행복한 고백

by 강훈

우리는 정보를 '섭취'하는 일에는 능숙하지만, 그것을 '사유'하는 일에는 턱없이 서투른 시대를 살고 있다. 1분짜리 요약 영상과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독서를 대체하는 속도전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행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비효율의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글 쓰는 존재'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다.


디지털의 편의와 아날로그의 무게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미국에서의 삶은 우리말로 된 종이책을 들고 있는 자체가 대단한 여유이자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어 책 한 권을 손에 쥐기 위해 치러야 할 시간과 비용의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밀리의 서재' 같은 독서 플랫폼은 가뭄 끝의 단비와 같다. 태블릿의 매끈한 화면 위로 쏟아지는 수만 권의 책은 물리적 한계를 지우고 우리를 거대한 지식의 바다로 인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종이책만의 고유한 촉감과 특유의 냄새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단순히 복고적인 향수가 아니다. 화면 속 글자가 정보라면, 종이 위 글자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스쳐 가는 디지털의 읽기가 '확장'이라면, 손가락 끝으로 질감을 느끼며 멈춰 서는 아날로그의 읽기는 '심화'다. 이 두 세계의 경계를 유영하며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을 내 안으로 모시는 정중한 의식을 치른다.


읽기가 글쓰기를 불러오는 순간

내가 글을 쓰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은 대단한 창작의 욕구 때문이 아니라, 읽기의 부채감 때문이었다. 훌륭한 문장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문장이 던진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지고, 그 통찰이 닿은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본능적 충동을 느낀다.

읽기가 수동적인 수용이라면, 글쓰기는 그 수용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응답이자 주권적 반응이다. 많은 책을 읽으며 쌓인 누군가의 지혜는 내 안에서 발효되어 결국 '나만의 언어'로 터져 나온다. 글쓰기는 결국 내가 읽은 것들에 대한 고백이자, 그 거장들에게 보내는 뒤늦은 답장인 셈이다. 읽지 않는 자는 쓸 수 없고, 쓰지 않는 자는 자신이 무엇을 읽었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쌓여가는 책이라는 행복한 절망

여전히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고, 읽고 싶은 책이 줄을 서 있는 현실은 비관이 아닌 축복이다. 일본어에는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을 뜻하는 '츤도쿠(積ん読)'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가 저토록 광대하다는 겸손한 지도가 된다. 읽지 못한 책들이 서재에 쌓여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가는' 중임을 깨닫는다.

세상은 끊임없이 '다 읽었느냐'고 묻고, '무엇을 얻었느냐'고 결과물을 다그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읽기 중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승점이 아니라 그 끝없는 경로 자체다. 다 읽지 못한 책들은 우리가 아직 살아내야 할 내일의 이유가 되고, 그 책들 사이에서 발견한 단 한 줄의 문장은 오늘을 버티게 하는 작은 버팀목이 된다.


당신의 서재는 지금 자라나고 있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내가 읽은 것들의 총합을 다시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이다. 나에게 독서는 아마도 고국과의 연결고리이자, 낯선 땅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요새일 것이다.

오늘도 서재 한구석에, 혹은 태블릿의 보관함 속에 읽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한가? 부디 그 풍경을 사랑하길 바란다. 그 책들은 당신이 언젠가 써 내려갈 위대한 문장들의 예비군이자, 당신의 영혼이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당신은 지금 충분히 행복한 부채를 지고 있으며, 그 빚은 머지않아 당신만의 눈부신 문장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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