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속도

효율이라는 이름의 서툰 작별

by 강훈

우리는 모든 것을 ‘해치우듯’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끼니를 때우고, 업무를 처리하고, 휴식마저 다음 과업을 위한 재충전이라는 이름으로 서둘러 끝낸다. 효율과 속도가 신앙이 된 사회에서 ‘기다림’은 곧 ‘낙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조급한 속도전이 이제는 생의 마지막 문턱인 장례식장에까지 침투했다.

최근 전해지는 소식들은 놀랍다. 전통적인 3일장 대신 하루 만에 모든 절차를 끝내는 ‘1일장’이나 빈소조차 차리지 않는 ‘무빈소 장례’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마저 ‘가성비’와 ‘효율’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건 아닐까.


- 1일장이 삼켜버린 슬픔의 완충지대

장례의 절차가 간소해지는 것을 단순히 경제적 부담이나 1인 가구의 증가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과거의 3일장은 단순히 고인을 기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겨진 이들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충격을 일상으로 서서히 소화해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완충 시간’이었다. 첫날의 부정과 둘째 날의 절망, 그리고 셋째 날의 받아들임. 이 일련의 과정을 3일이라는 물리적 시간 속에 녹여내며 우리는 비로소 이별을 준비했다.


- 슬픔을 견디는 체력을 잃어버린 사회

하지만 지금의 1일장은 이 감정의 공정을 생략한다. 죽음은 슬퍼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빨리 처리해야 할 ‘행정 절차’가 되어버렸다. 빈소를 차리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슬픔에 참여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고 그 곁을 묵묵히 지켜줄 ‘정서적 체력’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비극에 깊이 연루되는 것을 번거로워하고, 그저 계좌번호로 마음을 대신하며 서둘러 일상이라는 안전지대로 도망치려 한다.

이러한 ‘압축 장례’의 이면에는 인간을 오직 생산성으로만 평가하는 차가운 시선이 숨어 있다. 죽음조차 산 사람의 스케줄에 맞춰 신속하게 ‘로그아웃’ 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애도의 기간을 비효율적인 낭비로 치부하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설 자리를 잃는다.


- 당신은 어떻게 쉼표를 찍겠는가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그 삶이 어떤 온도로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문장이다. 1일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문장을 서둘러 마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삶 또한 그렇게 가볍게 취급받아도 좋다고 동의하는 것과 다름없다.

효율적인 죽음이란 없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며, 남겨진 이들에게 지독한 불편함을 주는 사건이어야 한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함께 멈춰 서는 시간,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세상이 당신에게 슬픔마저 서둘러 정리하는 것이 낫다고 제안할 때, 잠시 멈춰 서서 그 상실의 무게를 온전히 느껴보길 바란다. 마지막 순간, 당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서둘러 치워야 할 짐이 아니라, 오래도록 머물며 곱씹고 싶은 깊은 여운이 되기를 바란다. 당신이 오늘 누군가의 슬픔 곁에 머물기로 한 그 지루한 시간이, 사실은 당신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가장 뜨거운 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