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도 5월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작은 변화에 찬찬히 흐르던 일상은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활기찬 기운을 불러오는 듯했다. 그런데, 그 설레는 활력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무언가 찜찜한 마음이 먼저 들어섰다. 새로운 일은 영국에 법인을 설립하는 한국 회사를 위해 필요한 행정 절차, 업무 조사 및 현지화를 위한 컨설팅 업무였다. 한국 본사는 탄탄한 듯 보이는데, 법인을 세우려 파견된 직원은 영 시원찮아 보였다. 앞 뒤 맞지 않는 불명확한 의사소통 때문에 처음부터 이 회사에 대한 의문이 크게 생겼고, 이는 미팅을 통해 그야말로 하나씩 하나씩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풀어야만 했다.
영국에 처음 와서 낯선 것이 많아 그럴 수도 있겠지, 본사에서 이 사람 혼자 법인 설립을 위해 보낸 이유가 있겠지 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 6월이 되었다. 그리고 영업팀 직원 하나가 일을 시작했다. 재택근무였고, 영업 관련 직원이니 딱히 서로 만날 일은 없었으나, 사무실 위치를 정하고 계약하는 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미팅을 위해 몇 차례 만나야만 했다. 한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직원은 한국 본사에서 온 차장과 무슨 말을 섞었는지 거짓 의사 전달과 상황 조작으로 나를 속이려던 정황이 드러났다. 본능처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차장에게 상황 설명을 요청했고, 그의 궁여지책 변명 덕에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미안하다며 이런저런 생각 말고 일만 보고 계속 함께 가자는 말을 연신 내뱉었고, 좋은 회사이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말을 이었다. 영업 직원은 본인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상황을 설정하느라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차장이라는 사람은 그에 동조하며 상황을 방관했는데, 어떻게 일만 보며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선명해질수록 이런 사람들에게 쓴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니 화가 솟아올랐다. 사소한 오해라며 되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차장의 태도 또한 그저 기이하기만 했다.
그간 여러 곳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참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본인 역할은 제대로 하지 않으며, 다른 이에게 일을 미루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 능글맞게 윗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며 입으로만 월급 받아먹고사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아다다 설정으로 따발총보다 더 빠르게 실수를 연발하며 동료들에게 업무를 과중시키는 사람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 또한 다 먹고살기 위한 각자의 선택이고, 그런 상황에서도 이리저리 맞춰가며 일하는 것은 사회생활의 한 부분이니 어쩔 수 없지 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상황을 모르면 몰랐을까 면전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내어놓던 웃음끼 띈 그 얼굴, 다 알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동조하던 차장의 눈빛, 모든 게 명확해질수록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다시 느껴졌다. 이런 사람들과 다시는 엮이기 싫어 일을 당장 그만두기로 하려는데 잠시 고민이 들었다. 구직 활동을 다시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다른 곳보다 괜찮은 급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소한 오해라고 여기고 그냥 계속 일을 해 볼까?', '겪어보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회사는 관계를 쌓는 곳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곳이야'라고, 이 상황을 넘겨버리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무언가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산다. 나에게 그것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조정하고, 속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 사람을 만나 시간을 쓰는 일이었다. 거기에 조정 대상이 나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분노는 극에 달했다. 처음 접하는 상황이라 이렇게까지 솟구치는 분노의 감정을 마주하는 게 낯설었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내어놓은 고민은 결국은 현실과 타협하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더 존중해주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무엇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느라 고생한 마음을 잘 보살펴 주고 싶었다. 어찌할까 방법을 고민했다.
회사에 불만이 있어 그만두더라도 두루뭉술 다른 계획이 있다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오던 여느 때와는 달리 한국 본사 임원진과 영국 법인 차장에게 이메일을 써 내려갔다. 신뢰를 쌓기도 전에 거짓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되물었고, 이제 막 설립을 시작한 영국 법인의 재무 업무까지 앞으로 담당하기로 한 사람으로서 이 일을 사소한 오해라 넘기기에는 너무도 많은 뜻이 담겨 있다며 강한 어조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글쎄... 그들은 다른 사람을 찾아 그 자리를 채우면 되겠지만, 난 다시 구직활동을 위한 번거로운 일상을 시작해야 하고,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 거절했던 자리에 대한 미련까지 지워버려야 했다. 손해 본 듯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결국 참을 수 없이 일던 분노의 마음을 읽어주기를 선택했고, 현실과 타협 없이 용기 내어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살피느라 내가 느낀 부당함과 분노 그리고 화남의 감정은 뒤로 밀려야 할 때가 대부분이고, 괜한 말 꺼냈다가 껄끄러워지는 관계를 생각해 삼켜버린 말들은 더 많다.
어쩌면 우리는 '나만 참으면 되잖아.' 하며, 스스로를 무엇이든 다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것, 괜찮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것은 상처 나기 쉬운 여린 마음에 단단한 내력을 갖추어 스스로를 건강히 지키며 살고 싶은 바람이자,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선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결심이기도 하다. 덕분에 다시 구직 활동이라는 번거로움을 껴안기는 했지만, 이 일을 통해 자기 존중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존엄성을 위한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고 나니, 여리고 작은 마음에 뿌듯한 내력 하나가 생겨난 듯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작은 결심으로 크게 달라진 건 다름 아닌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