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추억하는 단어

by 김라희

요 며칠 영국이 후끈 달아올랐다. 뜨거운 해가 뜨겁게 내리 꽂히는 런던은 낯설지만 신이 나 날아갈 지경이다. 아무리 움직여도 땀이 잘 나지 않는 몸뚱이로 살아야 하는 난, 건강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서 땀을 꼭 빼야 한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 오죽 좋을까. 아무렇게나 가벼운 옷을 입고, 가만히 있어도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주니 서늘한 바람에 항상 긴장해 있던 근육은 노곤노곤 포곤포곤 한가롭기만 하다. 서울에서도, 런던에서도 단연코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다. (야홋!) 어디든 떠날 수 있고, 바다, 강, 호수 마음껏 뛰어들 수 있으며, 맛있는 과일은 지천에 널려 언제든 베어 물기만 하면 그 단 육즙을 내어준다. (야호홋!) 여름 사랑을 고백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 여름을 추억하는 단어들이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기에 그 사랑은 끝이 없다.





여름 방학, 초등학교 때까지 여름 방학은 무조건 시골 할머니 댁에서 최소한 일주일은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그게 그리 귀찮고 싫었다. 친구들이 없는 시골의 한 여름, 일주일이 너무 길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삼복더위가 기승인 그곳에는 이른 아침부터 귀청 떨어지게 매미가 울어재꼈다. 매미 소리는 엿가락처럼 늘어진 오후 시간을 더 길게 만들어 놓곤 했다. 놀고 또 놀아도 또또 놀아도 이제 겨우 오후 2시.


할 일없이 무료한 오후 시간이면, 대청마루 끝에 머리를 내어 놓고 느리게 흐르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버렸다. 그 하늘은 파아랗고, 하아얗고, 지붕 위까지 올라온 커다란 감나무의 잎들은 찌 인한 초록이었다. 맴맴 맴맴맴 매미 소리를 가득 입은 여름의 색이 잔잔히 흐르던 할머니 댁 대청마루. 오후의 긴 그림자처럼 시간은 왜 그리도 길던지. 개미, 잠자리, 나비, 메뚜기, 사마귀, 매미 등이 없었더라면 큰 일어날 뻔했다.


봉숭아 물들인다고 꽁꽁 싸매 두었던 실매듭이 밤 사이 풀려 아끼던 하얀 잠옷에 붉은 물이 보기 싫게 들어 버렸다. 투덜투덜 길게 볼맨 소리를 하다가 할머니께 혼쭐이 나서는 눈물 콧물 쏙 뺐던 아침. 모깃불 옆에서 얼굴만 한 수박 한 조각 들고 동생이랑 시시덕거리며 수박씨를 멀리멀리 내뱉던 밤. 재미없어 가기 싫다던 시골이지만, 한 여름의 잔잔한 지루함이 잔뜩 담겼다. 그런 여름 방학을 간직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떠올리면 미소 짓게 되는 예쁜 단어로 남았으니.


찬물 목욕, 뜨거운 태양이 종일 내려쬐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그저 찍찍 흐른다. 이런 날은 이 판 사판 더 신나게 놀거나 몸을 바쁘게 움직여 버린다. 더 가열하게 땀을 쏟아 낸 후 닭살 올라올 만큼 차가운 물로 온 몸을 씻고 나면, 세상 최고의 개운함을 맛볼 수 있기 때문! 그 개운함이 한 껏 올라오면, 어서 노오란 참외를 냉장고에서 꺼내 잘 깎아 접시에 담아야 한다. 찬 기운이 아직 남은 체온과 물기 가득 머금은 머리카락 그리고 길게 썬 참외가 아삭아삭 씹히는 여름 저녁의 편안함이란. 한낮의 뜨겁던 열기는 찬물 목욕의 개운함으로 사라지고, 아삭한 참외는 낮동안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 그저 만족스러움만 내려준다. 찬물 목욕, 바쁜 일상의 긴장감을 투 욱하고 풀어주는 단어다.


서쪽 하늘, 낮이 뜨거울수록 해가 떨어지는 서쪽 하늘이 뿜어내는 색은 더욱 아름답다. 뜨는 해보다 지는 해를 더 좋아하게 된 건 어렸을 적 그 한 장면 때문이다. 서울에서만 살던 우리 가족은 무슨 이유로 경기도로 잠시 이사 간 적이 있다. 그곳엔 젖소 목장이 있었고, 3층짜리 건물을 신식 아파트라 부르던 곳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그곳에서 보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 두 해 동안은 거의 매일 볼이 빨개질 정도로 뛰어놀았다.


한참 놀다 세상이 핑크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친구들과 아쉬운 안녕 인사를 재빨리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게 엄마와 나의 약속이었다. 낮은 아파트가 서 있는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다 보면, 건물들 사이 빨간 해가 동그란 얼굴을 내밀고는 "오늘도 잘 놀았어?" 하고 묻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서운한 마음을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 그 친절한 해가 뿜어내는 색이 너어어무 예뻐 넋 놓고 한참을 올려다봤다. 그때부터였다. 붉게 떨어지는 해가 쏟아내는 몽글한 핑크빛 가득인 서쪽 하늘을 사랑하게 된 건.


BBC Proms, 영국에 오던 첫 해에 생애 처음으로 큰 도시를 벗어나 살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다. 꿈에 그리던 바닷가 앞에 집을 찾아 매일 바다를 걷곤 했다. 유난히 영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2006년 여름, 해변가에 커다란 수건 하나 깔아 두곤 대자로 누워 지글지글 몸을 앞뒤로 굽던 시절, 태어나 그렇게 까맣게 그을렸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저녁까지 뜨겁게 놀다 들어오면 매일 BBC에서는 클래식 공연을 생중계로 내보냈다. 맥주도 좋고, 화이트 와인도 좋고! 알코올과 과일을 옆에 끼고 누워 공연을 매일 시청했다. 9월까지 그렇게 방구석 클래식 산책을 아주 마음껏 했다. '독립이란 건 참 좋은 거구나' 그렇게만 생각할 수 있었던 그 해 여름은 태양에 끓어오르던 바다와 BBC Proms 뿐이다.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90여 개의 클래식 콘서트가 매일 열리는 여름밤, 독립의 자유를 무한히 축하해 주는 것만 같던 그 여름밤이 지금도 그리워 매 년 티브이 시청이 모자라 꼭 몇 차례씩 공연장을 찾곤 한다.




서울의 여름이 자주 그립다. 그러다 찐득한 열대야에 잠을 설치던 시간을 떠올리며 '아니야, 그래도 밤에는 선선한 영국이 더 좋지, 여름은' 하며 지금 있는 곳을 조금 더 소중하게 바라보려 한다. 찬물 목욕은 언감생심인 이곳 런던의 여름은 아주 짧아서 귀하다. 오늘도 귀하게 쏟아지는 해를 받으며, 여름을 추억하는 단어들을 내어놓고 나니 바스락지게 건조하던 일상이 다시 촉촉해지는 듯하다. 다른 이들의 여름에는 어떤 단어가 담겨 있을까. 추억이 깃든 단어를 나누며 술 한잔 나누고 싶어 진다,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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