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만난 이탈리아
몇 일째 비가 내려 오늘도 꼼짝없이 집에나 있을까 싶었는데 불현듯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느지막이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시내 운전인 남편은 앞, 뒤, 양 옆을 주의 깊게 살피느라 다른 때보다 더 피곤해한다. 혼잡 통행료 내는 구간을 요리조리 피해야 하고, 자전거 타는 사이클 리스트도, 배달 음식 주문량과 함께 늘어난 오토바이 행렬에도 조심해야 하기에 그럴 만도 하다. 운전에 능통한 남편 덕에 옆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BBC 라디오를 들을 수 있고, 타워 브릿지를, 템즈 강변을 여유롭게 구경하며 새로 오픈한 가게와 완공된 빌딩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으니, 이럴 때면 런던에서 운전을 시작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도 얄밉게 든다.
해가 냉콤 비춘다. 망설임 없이 작은 선루프를 연다. 우리는 둘 뿐이라 fiat 500을 탄다. 작고 실용적인데 거기에 선루프까지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 단번에 선택했다. 잠깐 나오는 해가 있는 날이면 그게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 따뜻한 해를 잠깐 즐기다 보니 어느새 쇼디치에 도착했다. 주말이면 혼잡 통행료를 내지 않아 시내에서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주말에도 밤 10시까지 혼잡료를 내야 한다. 그 때문인지 혼잡료를 내지 않는 구간에는 교통체증이 더욱 심해진 듯하다. 일 년 동안 시내에는 참 많은 게 변했다. 항상 주차하던 레드 처칠 로드의 거의 모든 곳은 주말에도 주차료를 부과하거나, 주차 금지 구역으로 변했다. 그래도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주차 구역을 찾아 배회했다. 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요일 오후 2시 이후 주차가 가능한 곳을 발견했다. 순간 차 한 대가 자리를 뜬다. 주차운 하나는 끝내준다.
차를 대고 내린 곳은 콜롬비아 로드다. 주말 아침이면 이곳에는 꽃시장이 열려 시끌벅적하다. 런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인데, 오늘은 오후 늦게 도착한 탓에 꽃다발 든 사람들만 축축한 거리를 채우고 있다. 좀 걸었을까? 꽤 괜찮은 가구점이 나타났다. 이름도 간단하다. "two columbia road" 주소를 그대로 땄다. 레트로 스타일의 가구들이 가득하다. 편한 차림의 주인장은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소파에 앉아 우리를 맞이했다.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는 질문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입구 왼편 나무 테이블 위에 진열된 1960년대 제작된 크리스털 디저트 볼이 눈에 먼저 든다. 6개의 작은 볼과 커다란 볼 하나로 구성되었다. 한눈에 반해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였다. 역시나... 가격이 좀 있다. 아쉽다... 끝내 눈으로만 호강하고 가게를 나섰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리버풀 스트릿이다.
남편이 한국 슈퍼마켓 가까이 위치한 곳에 집을 마련하도록 동의해 준 덕에 한식 재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그게 그렇게 푸근할 수 없다. 타향살이의 힘은 무엇보다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자라면서 먹었던 음식을 언제든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두고 사는 일은 추운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데우는 모닥불과 같다. 그러니 남편이 가끔 이탈리안 식재료도 마음껏 구할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며 내어놓는 그 바람을 어찌 이해 못하랴. 지난 4월, 리버플 스트릿에 런던 최대 규모의 이탈리안 푸드 홀이 오픈했다. EATALY!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의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정작 본인이 살 던 이탈리아에서 이곳을 만났을 때는 시큰둥하더니. 록다운 기간 동안 시내 한 번 나가지 않은 남편 콧바람도 쐬어주고, 이탈리안 음식까지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이 반짝인다. 커피 한 잔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너 시간 가까이 이탈리아를 만나며 언제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곳을 그립게 반가워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칠리아에서 온 허브향 담은 빼꼬리노(양젖 치즈)와 부시 아떼 파스타, 양젖 특유의 향이 부드럽게 감싸는 볼테라의 빼꼬리노, 볼로냐에서 온 모따델라, 바실리카타의 알리아니꼬 레드 와인, 제노아에서 온 가쪼사 레몬 소다, 칼라브리아 산 벨가모또 소다 등 장바구니에는 이탈리아 북쪽부터 남쪽까지 동네 방네에서 온 음식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실내에서 앉아 먹을 수 없으니, 식재료를 들고 어서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비는 아까보다 더 많이 내린다. 난 한 손에 와인 병을 남편은 어깨에 장바구니를 둘러매고 빗 속을 한참 걸었다. 오랜만에 우산 없이 맞는 비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주차된 차가 보이자 마음이 놓였지만, 좀 더 걷고 싶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트렁크 실린 음식들 때문인지 빗 속을 운전하는 남편 얼굴에 미소만 가득하다. 한국 슈퍼마켓에서 김치, 만두, 떡볶이 재료 등을 그득그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느꼈던 행복감을 그도 지금 느끼고 있겠지? 우리처럼 타향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본토에서 온 음식은 귀하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소중하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 집에 도착해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이 올리브 오일을 둘러 참치와 안쵸비를 넣고 파스타를 만드는 동안 난 커다란 접시에 치즈와 살라미, 모따델라를 가지런히 놓고 와인을 미리 잔에 따라둔다. 11월 말까지 이탈리아 남부의 태양을 가득 담은 알리아니꼬 와인의 진한 향이 입맛을 돋운다. 참을 수 없어 잔을 가져가 파스타 만드느라 바쁜 남편과 건배 후 한 모금 마셨다. 종일 밖에서 축축하게 떨던 몸이 와인 한 모금과 함께 스르륵 녹는 듯하다. 멀리까지 다녀온 보람이 넘쳐나는 순간이다. 대략 두 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하며, 그동안 다녔던 이탈리아 작은 동네의 추억을 곱씹으며, 여행의 그리움도 달랜다.
순간 이곳이 런던인지 이탈리아 어느 작은 도시의 트라토리아(trattoria, 식당)인지 분간이 어렵다. 어느새 와인 한 병이 훌쩍 비워져 간다. "In vino varitas, 와인에는 진실이 있다." 뜨거운 해가 가득 담긴 진한 레드 와인을 마실 때면, 쉽사리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서 밖에서는 잘 마시지 않지만, 남편 앞이라면 무장 해제다. 그렇게 마시다 보면 오래 묻어 두었던 생각도 함께 무장해제된다. 오늘도 남편에게 와인 핑계 삼아 그동안 아껴 두었던 불만을 살짝 흘려 본다. 기분 좋은 남편은 평소보다 더 너그럽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수긍한다. 늦 봄까지 쌀쌀한 "영국 날씨" 덕에 레드 와인을 맘껏 즐길 수 있으니 느닷없이 고마움이 올라온다. 취했나 보다. 우리가 온 곳이 비록 한국과 이탈리아이지만, 함께 타향 생활을 하니 그 마음은 서로 너무 잘 이해한다. 두 시간 넘는 긴 여정의 목적은 이탈리안 식재료 공수였지만, 그보다 오랜 시간 가족을 만날 수 없는 남편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내 바람도 들어 있었다. 타향 살이, 그렇게 우리는 서로 이리 다독이며 또 한 주를 시작할 힘을 충전한다. 그리고 런던에는 다음 주도 내내 비가 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