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일은 대부분 우연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코로나 "덕분에" 자유 시간이 많아진 지난 2년 간 어떻게 이 시간을 쓰면 좋을까 너무 고민했다. 우습게도 꽤 많은 시간을 고민 자체에 써버렸고, 이걸 눈치채기 시작한 순간부터 무엇이라도 실행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섰다. 그때 번뜩 생각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이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얼마 전 석사 공부를 마쳐 그녀에게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고민 없이 영어 발음 좀 교정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건넸다.
사람 만날 기회가 줄어들다 보니 가끔 영어로 진행하는 인터뷰나 일주일에 이틀 정도 하는 재택근무를 제외하면 타인과 영어로 말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렵사리 꾸려온 영어 실력이 고물이 되어가는 듯 어떻게라도 기름칠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졌다. 우연처럼 만난 그녀는 다른 사람을 가르쳐 본 경험이 많지 않아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망설였다. 그때 "그럼 우리 책 한 권을 정해서 함께 읽어보자!" 하며 불현듯 제안했고, 결정이 빠르고 유쾌한 그녀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의 책 읽는 시간은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졌다.
프랑스 작가 시몬느 보부아르의 소설 <All men are mortal>를 읽기로 했다. 소설이라 읽으며 이야기에 빠져 대화 나누기도 즐겁고, 내용을 다 이해하려면 작가에 대한 레퍼런스가 필요하긴 해도 단어 수준이나 문장을 놓고 봤을 때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내가 추천한 책이었기에 함께하는 그녀에게도 괜찮을까 하는 염려를 했지만, 읽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점점 영어 발음을 교정하려던 본래의 목적에서 나아가 내용과 인물에 흠뻑 젖어 들어 어느새 우리는 주인공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누고, 연관된 내용의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누며 돈독한 사이를 만들 만큼 그 염려는 무색해졌다. 발음 교정이 목적이던 우리의 시간은 이제 낭독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쓰고 읽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귀 딱지가 앉아 화석이 될 만큼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지만 낭독에 대한 경험은 그것도 누군가와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경험은 사회인이 된 후 처음이다. 읽기 수업 첫날 선생님 동생 앞에서 첫 문단을 읽는데 뻔뻔해질 용기가 너무도 필요했다.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어색했고, 좀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민망한 감정이 먼저 일었다. 등줄기가 좀 더워질 무렵 에라 모르겠다 하며 그냥 읽어 나가기 시작한 때부터 그제야 좀 흐름을 타며 쑥스러운 감정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도 매 낭독 처음 몇 문단은 어쩔 수 없이 그 쑥스러운 감정을 비워내는데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3장은 내가 읽고, 다음 2장은 선생님이 읽는 식으로 진행하는데, 예상보다 몇 배의 집중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점점 더 알게 된다.
종종 혼자 한국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외국 생활이 오래되면, 모국어도 어눌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소리 내어 영어책 읽는 게 뭐 어려운 일인가 하며 가볍게 시작했는데, 혼자 읽을 때와 누군가와 함께 읽을 때는 또 다른 차원이다. 목소리는 잘 들릴 수 있게 힘도 주어야 하고, 눈은 입보다 몇 단어 앞을 읽어 나가고 있어야 하며, 발음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두어야 하고, 그러려면 주변의 소음과 상관없이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 시간 가량 낭독 시간이 끝나고 나면 배가 출출할 정도로 에너지를 쓰게 된다. 또 소리내어 읽고 나면 아는 단어와 모르는 단어의 구분이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단 눈으로 먼저 읽고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모르는 단어 혹은 잘 사용하지 않는 구문이 나왔을 때, 여지없이 발음은 꼬이고, 소리는 버벅거릴 수밖에 없다. 그럼 밑줄 쫘악 긋고 집에 와 단어를 찾아 기록하고 공부해 둔다. 책 읽는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책을 읽다 보면 내 목소리 톤이 이렇구나, 어떤 발음을 내기 힘들어하는구나,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은 왜인지 등을 분석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이를 교육 학습법에서는 메타인지라고 한다는데, 낭독을 통해 이를 체험하게 될 줄이야. 그야말로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족한 부분을 알고, 채워가는 능동적인 학습법을 스스로 익혀가는 중이다.
배우고 익히는 걸 즐기지만, 게으르고 쉽게 흐트러지는 "인간 본성" 때문에 무언가 하려면 작정하고 달려들지 않는 한 일이 흐지부지 되기 쉽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우연히 무엇이라도 해보자며 일을 만들어 놓은 게 벌써 석 달이 지나간다. 12월 방학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한 우리 둘의 의지가 대단하다. 다음 챕터가 궁금하고,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갈 동생 선생님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날이 언제 올지 아직은 몰라도 낭독의 즐거움을 보물찾기 하듯 그 끝을 꼭 가보고 싶다. 영어 발음 교정 선생님, 낭독 친구에서 이제 이뻐하는 동생으로 사이가 발전하고 있는 우리의 시작은 우연히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 덕분이다. 무엇이라도 함께하면 멀리 길게 갈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이렇게 또 경험한다. 그리고 <어쩌다, 낭독> 이 시간을 더 많은 사람과 의미있게 나누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