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면 떠오르는 마음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를 향하는 언덕, 그 어깨 즈음에 자리한 피아노 학원에 앉아 연습하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마음이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뛰어내려오다 속력이 붙을 때 즈음 오른쪽 골목으로 발걸음을 틀어 학원 문을 드르륵 연다. 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에 방 하나, 정면에 방 하나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피아노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1층 연습 방 중 가장 좋아하던 곳은 학원 밖에서도 연습하는 모습이 보이는 정면에 위치한 방이었다.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고, 학원 정문이 활짝 열려 있는 날이면, 오고 가다 나를 알아보고 장난을 걸어오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 왼쪽 높은 창을 통해 연습하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예리한 선생님의 눈초리는 바빴고, 우리는 매일 최소 한 시간은 꼬박 딴 짓은 언감생심 피아노만 연신 뚱땅일 수밖에 없었다. 연습이 한참 지루해질 즈음, 학원 앞을 오고 가던 친구들이 몰래 장난을 걸어오면 무겁게 내려앉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점점 더 복잡한 악보를 치기 시작하던 때부터 연습 시간에 멜로디를 내어놓는 손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스스로 예습과 복습은 물론 치고 싶은 악보를 가져다 연습하는 능동적인 어린이로 살던 유일한 시기였기에 창문을 오가는 선생님의 눈초리와 상관없이 몰입하는 손끝의 팔랑임은 멜로디와 함께 춤췄다. 5학년이 되던 해였다. 봄바람이 불고 학원 문이 활짝 열린 때부터는 그 누구보다 먼저 원하는 연습 방을 차지하려 바람보다 빠르게 언덕길을 힘껏 달려 내려왔다.
같은 반 친구 한 명을 좋아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뽀얀 피부와 커다란 눈,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친구들을 이끌던 아이였다. 똘똘하게 공부도 잘하고, 옷 입는 센스도 멋스러웠으며, 장난기도, 인기도 많은 그런 아이였다. 그 친구는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짝꿍이 되어 같이 앉자고 말하기도 하고, 엉뚱한 질문을 가끔 하나씩 던지며 꽤나 날 당황스럽게 했다. 소극적이던 어린이 시절 거침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그 친구가 참 멋있게 다가왔다. 쇼팽 연습곡을 자신 있게 칠 수 있던 순간부터 다른 친구들처럼 그 아이도 우연히 학원 앞을 지나길 바랬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아이의 우연한 인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 후로도 고등학교 때까지 간간히 그 아이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줍은 안부를 나누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 앞을 지나며 내 모습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은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멜로디가 가 그에게 가 닿기 바라던 순수함만 담아두었을 뿐. 글을 쓰다 보니 그 간절했던 마음이 여기에도 있다는 걸 느낀다. 단지 그게 누구일지, 누구였으면 좋겠는지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 다를 뿐. 쇼팽 연습곡 하나를 다 익혀 자신감이 생겼을 때, 마음에 드는 문장이 어쩌다 뽑혀 나왔을 때 소년에게, 누군가에게라도 가 닿아 만나기를 깊이 소망했고, 바란다.
더욱 매력적인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능동적 어린이로 살던 5학년 소녀의 첫 의지이다. 문장마다 정성을 기울이려 노력하고, 그것들이 어딘가에서 잠시라도 피어나길 또 바란다. 봄바람 따라 등을 치며 장난을 걸어오던 친구들을 기다린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몰입의 고독이 두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문장을 지어내고 나누는 사람들이 더 귀해진다. 오늘도 여전히 진득하게 앉아 쓰며, 누군가 몰래 내 어깨를 살포시 두드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다시 품는다. 볼 살 통통하던 작은 방 피아노 연습실 소녀가 거기 그렇게 있다. 그때처럼 손가락을 나풀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