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수요일,
찬 바람 곁에 봄이 붙어 날아다닌다. 내리는 해는 겨울 내 숨어 있던 생기를 북돋느라 따사로운데, 두꺼운 겨울 옷 중 세상 구경 한 번 못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운명에 처한 녀석들은 애처롭다. 날은 푹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바깥공기 쐬어주고 싶은 욕심에 꾸역꾸역 끼어 입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등줄기가 벌써 뜨거워진다. 결국 무거운 코트는 벗어 팔에 걸고, 잰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괜히 넘치는 관심은 버려도 된 다는 걸 팔이 아파가며 미련하게 배운다.
오랜만에 화장을 곱게 했다. 일 년 넘게 화장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걸 오늘에야 알아채고는, 유통기한부터 확인한다. 파운데이션, 쿠션 파우더, 마스카라 등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어느 날의 내 노동을 바라보며, 좀 부지런히 바르기라도 할걸 후회한다. '마스크가 얼굴의 반을 덮으니 화장할 일이 없었잖아.' '갈 곳도 없었는 걸...' 하며 아까워하는 마음을 달래다 '혼자 있어도 좀 이쁘게 있어볼걸.' 그런다. 오늘치 후회는 이렇게 다 썼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첫 만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한 화장이다. 걸음마다 찰랑이는 치마폭에 설렘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어색해도 말이 편하게 나오는 걸 보니 그분도 날 많이 배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설렘이 헛되지 않았다. 내리는 햇살같이 포근하게 첫 만남을 마무리하고 버스를 탔다. 사람 만나는 걸 어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조곤조곤 나눌 수 있는 스스럼없는 성격이라는 게 행운처럼 다가온다.
키 작은 미용실,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만 할 것 같다. 남자 헤어 드레서 분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린다. 어느 여름 오후, 느리게 흐르는 구름처럼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채운다. 나른하게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며,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머리를 한 게...' 기억을 더듬어 본다. 허리까지 길어버린 머리카락이 무심하게 흘렀던 시간을 대신 알려준다. 한국 분이 하시는 곳이라며, 소개받아 찾아간 이곳에는 모델 이소라와 헤어 드레서분이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이 한쪽 벽에 크게 걸려있다.
미리 찾아 둔 어느 여배우의 사진을 내어 보며, 얼굴은 보지 말고 머리 스타일만 봐달라 부탁했는데 굳이 우리 둘의 다른 얼굴형을 언급하며, 직접 스타일링을 해주신다. 잰걸음으로 걷던 아침만큼 등줄기가 더워진다. 무겁게 긴 머리끝은 목마르게 말랐지만, 내버려진 시간만큼 머릿결만은 건강하다. 고대기와 바니걸스를 언급하시는 헤어 드레서 선생님의 세월을 벽에 걸린 모델 이소라 언니를 바라보며 읽어본다. 이미 머리를 맡겼으니 어쩔 수 없다. 눈을 질끈 감는다.
어깨 길이에 숱을 많이 쳐낸 머리 덕에 목이 한결 편해졌다. 거울을 들고 뒷 머리를 확인하는 동안 커플 하나가 들어왔다. 바니걸스 선생님과의 시간에 끝이 보인다. 기대 없이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바쁜 몸짓으로 긴 설명을 하시는 선생님의 정성에 좀 감동을 하려했는데, 스프레이를 뿌려 주신다. '스프레이를 마지막으로 뿌려본 건 또 언제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끝까지 미소를 놓지 않는 그 마음과 집에서 손질을 어떻게 하면 이쁜 머리인지 알려주시는 친절함에는 만족했다. 한국 동네 미용실의 향수가 살랑살랑 가벼워진 머리와 함께 따라왔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유모차를 끄는 여자의 뒷보습이 눈에 익다. 같은 동네에 사는 회사 동료다. 초롱한 커다란 눈을 가진 딸과 함께 미술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육아가 힘들다지만 비행보다는 덜 힘든지 얼굴이 더 예뻐졌다. 잠깐 커피를 나눠 마시고, 유모차를 나눠 끌며 그동안 생긴 공백을 맺꾼다. 회사 생활하면서 밥 한 번,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사이였지만, 말이 물처럼 자연스레 흐르는 그녀 덕분에 어색함은 어디에도 없다. 인형 같은 그녀의 딸과 하이파이브를 여러 차례, 안녕 인사를 수십 번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곱게 한 화장을 지우며, 머리를 다시 본다. 세월의 흐름만큼 꼼꼼한 솜씨가 그제야 느껴진다. 아,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지 말기로 했다. 꼼꼼히 하루를 그렇게 다 쓰고는 이렇게 앉아 또 쓰고 있다. 길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