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적 필사

다른 이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는 수고는 무엇을 위함일까?

by 김라희




이건 육체적 노동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가만히 앉아 다른 이의 책을 그대로 옮겨 적는 일, 필사. 손가락부터 어깨, 허리, 엉덩이까지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다. 수고스러움을 넘어선 이 고단한 일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하려고 한다는 걸 서울에 머무르던 지난여름 알게 되었다. 어떤 마음이 다른 이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 수고를 기꺼이 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글을 옮겨 적는 손과 마음에 묻은 간절함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어 공부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 나도 필사라는 걸 했다. 신문 칼럼을 한 삼 개월 정도 매일 그냥 베껴 써 봤다. 시간이 정말 많았고, 어떻게 하면 빠르게 영어 문장과 자연스러운 표현을 체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궁리 끝에 시작한 일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어떤 글을 옮겨 적으면 좋을지 그런 기준은 하나도 없었다.


열정이 무기이던 시절,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써 보았다. 물론 삼 개월이 지났다고 필사의 결과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런던서 다시 대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 노력이 내어 준 빛을 만날 수 있었다. 학기 중 거의 매주 써내야 했던 에세이 때문에 죽을 만큼 고생했지만, 필사하며 써 내려간 문장 연습 덕분에 버틸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필사의 세계를 조금은 더 알아볼까 싶어 조성웅 작가의 <필사의 기초: 좋은 문장 잘 베껴 쓰는 법>을 읽었다. 더불어 필사를 직접 해 보면 그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글쓰기 모임에서 매일 주어지는 리드 문 필사도 경험 삼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남겨 준 작가의 문장에 내 개인적 경험을 실어 오늘 글에 나누어 본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깜깜한 그 시절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독서와 필사였습니다.


백일 글쓰기를 시작한 저 밑바닥에 깔린 이유는 엄마의 투병 생활이었다. 거의 넉 달을 부모님 곁에서 그제야 딸 노릇 좀 하려는데 걱정이 하나 들어선다. 이 긴 시간을 온전히 아픈 엄마를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는 내 정신이 끝까지 잘 버텨줄 수 있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이었다. 엄마와 가족뿐 아니라 나 자신도 잘 보살피고 싶었다. 그래서 런던에서 해오던 일 한 가지는 여기서도 꼭 하자 결심했다. 매일 책을 붙잡는다. 고단한 마음을 위로하는 마법 같은 시간을 낯선 일상에 넣어본다. 매일 밤 책과의 블루스, 리듬에 몸을 실 듯 문장 하나하나에 마음을 실었다.


그리고 한 시간씩 필사를 했다. 처음 열흘 시험 삼아해 보겠다던 의심 섞인 마음에 어떤 확신이 들었다. 갑자기 바뀐 일상에 적응하느라 시간 쓰는 게 정신 사납게 중구난방이다. 오후 2시경부터 호젓하게 한 시간 필사로 시간을 메웠다. 그렇게 점심 운동 후 필사에 집중하고 앉았으니 쓸데없는 걱정, 염려, 잡생각으로 팔랑거리던 마음에 가벼운 묵직함이 내려온다. 마치 복식호흡 깊게 하며 명상하는 듯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가벼운 묵직함이 믿음직스러워졌다.


이 시간을 위해 주변을 단정히 하고 앉는다. 시간도 잘 간다. 누군가에게 여분의 시간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을 만큼! 엄마에게도 권해드리고 싶어 노트 한 권을 사드렸다. 깜깜한 투병 시간이 지나간 자리를 독서와 필사로 추억할 수 있다니, 아! 이 얼마나 고운가.






짤막한 단상이라도 꾸준히 기록해 모으면 저작이 될 수 있죠.


너무 욕심내진 마십시오. 급할 건 없으니까요. 하루에 시 한 편만 옮겨도 금방 시간이 갈 겁니다. 지치지 않고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욕심내 많이 쓰는 것은 그리 좋지도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꾸준함을 새겨 넣는다. 이 책에서 기록이 주는 힘 더하기 잘 모아두기를 꾸준히 실행하면 자신만의 분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 공감했다. 넉 달여를 매일 아침 글을 쓰면서 든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든 진중한 노력을 기울여보고 싶다는 바람들 어선 것이다.


금방 배우고, 관심사도 금세 옮겨가는 촐싹거리는 성향 때문에 시작을 위한 노력은 크고, 잘하는 사람이지만 그 관심의 길이와 노력의 깊이가 짧고 얕은 편이다. 헌데, 글쓰기를 시작하니 함께하는 분들의 진중한 노력과 관심사를 대하는 깊이 있는 태도에 배우는 바가 크다. 쉬운 시작에 깊이 있는 태도와 꾸준함까지 더해보자 한다. (마흔도 되었으니!)


무엇이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노력하는 것, 그것에 모든 비밀은 숨어 있다. '사진에 관한 말'만 수집했다는 사진가 전민조 선생은 '워홀에서 히틀러까지, 688명이 말한 사진'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만들었다. 오롯이 사소한 기록을 수집했고, 그러다 보니 본인의 분야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보니 스쳐가는 문장의 기록이 긴 시간 쌓이다 보면 분류할 수 있게 되고, 그 분류를 잘 들여다보면 자신만의 취향과 분야를 찾아갈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된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길게 물고 늘어지는 것! 꾸준함이 주는 그 따사로움을 느껴보자!





필사는 결국 자기 글을 쓰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결국 다시 글쓰기로 돌아왔다. '필사는 단순히 베껴 쓰기라고 생각한다면 고정관념입니다.' 작가는 남의 글을 옮겨 쓰다 보면 내 글을 쓰고 싶어 진다고 한다. 필사의 마지막 목적지인 '내 글을 쓰기 위한 훈련'이라고도 했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는 밑천도 드러날 테고, 부족한 어휘력, 부서진 문장들과도 매일 만날 수밖에 없다. 쓰면 쓸수록 숙제만 남겨진다. 잘 쓰기 위해 걷는 이 아득한 길에 필사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그렇게 꾸준한 기록을 남기다 보면 내 취향과 분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갖게 된다.


필사적 필사, 쓰고 쓰고 또 쓰고 생각하는 일, 이리 걷다 보면 어디라도 부유스름 빛기둥이 나오겠지 해본다. 필사의 여운이 다시 질문을 남긴다. 무엇이 절실한가요? 무엇을 말하고 싶어 그렇게 쓰려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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