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생활이 어느덧 14년째로 접어든다. 애초에 이곳에서 살 계획으로 온 것이 아니기에 지금도 이렇게 긴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고 있는 모습을 돌아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헌데 요즘 부쩍 영국에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밖에 맘껏 나갈 수도 없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도 그럴만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무얼 써 볼까 유난한 고민을 좀 길게 하다 영국에 살아 좋은 점은 무엇인지 적어내려 가보기로 했다. 적다 보면, 요즘 잊고 있던 영국 살이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까 싶은 기대에서 말이다.
자, 그럼 영국에 살아 좋은 점을 하나씩 짚어 볼까?
그야말로 런던은 자연을 즐기기에 아주 훌륭한 도시다. 하이드, 그린, 리젠트, 세인 제임스, 리치몬드, 그린위치 공원 등등 생각나는 공원만 적어 내려가도 벌써 7개다. 오랜 세월 잘 자란 나무들은 물론 공원 안에 서식하는 동물들까지 떠올린다면 그 규모나 자연의 무성함에 감동할 정도다. 런던에 살면서 공원의 아름다움과 그 혜택을 몸소 느끼고 있다. 느긋하게 산책하고, 근처 카페에서 마시는 오후의 티 한 잔, 그 여유로움을 알아가며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어 좋다.
런던에서 지내다 보면 사실 도시가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지, 자연이 도심 속에 있는지 헷갈릴 만큼 대도시 런던은 자연을 잘 품고 있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멋스러움이 묻어난다. 그 자연을 언제든 찾아가 즐길 수 있는 영국 사람들은 꽤나 운이 좋다. 아마 그런탓인지 그들은 진흙에 발을 엉망이 되어도, 비가 내려 옷이 젖어도 자연을 걷는 일은 마다하지 않는다.
영국을 떠나면 뭐가 제일 아쉬울까를 떠올릴 때, 이 공원의 여유작작한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내 발목을 힘껏 잡고 있는 이 도심 속 자연, 멋스러운 여유가 가득한 런던!
이방인이라는 신분에는 한 집단에 속하지만 속해있지 않는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 자유와 함께 오게 되는 불이익과 불편함도 물론 있지만 오늘은 영국에 살면 좋은 이유를 말하는 글이므로 장점에 대해서만 언급해 보려 한다.
한국에서 살 때 비교는 꽤나 귀찮게 따라붙는 단어였다. 또래 집단 혹은 이웃 심지어 엄마의 친구 딸, 아들과 비교 선상에서 삶을 저울질당하며 혹은 저울질하며 살수 밖에 없었다. 영국에 이방인으로 살면서 가장 편한 것은 비교에서 혹은 사회적, 공동체적 윤리나 관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어도 괜찮을 수 있다는 장점이다.
외모, 살아온 환경,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며, 그리고 그 넓은 범위 안에서 영국인들은 이방인에게 꽤나 관대한 잣대를 적용한다. 그리고 꼭 그래야만 한다는 암묵적으로 적용되는 잣대가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서양문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을 하든 자신들의 범위 안에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규정보다는 그럴 수도 있구나. 저 사람은 혹은 저 사람이 온 문화권에서는 그렇구나라고 인정 혹은 수용하는 범위가 대체로 넓다. 그렇기에 이방인으로 생활하면서 한국에서와 같은 비교의 잣대를 사용하는 혹은 사용하게 되는 횟수나 범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비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니 다양성에 더 접근하게 된다. 직업을 대하는 태도부터 시작해 일상 속 끊임없이 마주하는 시선에 다양성이 묻어난다. 런던 혹은 그레이트 런던을 벗어나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난, 영국 다른 지역의 분위기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런던에서 타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관대함은 배울만하다고 느낀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 때보다 런던에서 한국인으로 살 때 갖게 되는 시선의 다양성 덕분에 자유로움이 한껏 더 느껴진다.
이건 두 번째 이방인의 자유로움과 연결된다. 한 문화권에서 태어나 살게 되면, 고착화된 생각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살아지게 될 수밖에 없다. 외부 환경이 변화되고, 언어와 문화가 달라졌을 때 두려움은 있을지 몰라도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은 유연해진다.
여행을 하는 이유도 이 지점이 아닐까? 자신을 자꾸 낯선 환경과 닿도록 기회를 만들며 그 환경 속에서 배우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이유다. 그런데 여행에서 나아가 외국에서 살아본 다는 것은 그 기회를 좀 더 긴 기간 숙성시키며 느낄 수 있는 전혀 다른 기회라고 본다.
영국에 살면서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외국에서 산다고 타성에 젖은 일상이, 고착화된 생각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노력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하고 접촉하다 보면, 다시 깨우쳐지는 생각이 있고, 다시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유연한 사고를 갖지 않으면 절대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외국 생활이다.
절대 이러면 안 돼!라는 기준점이 많았다. 하지만 런던에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절대 이러면 안 될 일도 딱히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도 줄어든다. 삶의 틀을 깨고 내 방식을 찾아 유연한 생각과 몸짓을 갖게 되는 건 나이가 들수록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부모님을 곁에 두고 살았더라면,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이 이렇게나 애틋하고 소중했을까? 영국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도 가족에 대한 생각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길어질수록 가족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애틋해져 만날 수 있을 때 더 자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 영원한 내 편, 안식처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진다. 아무리 친구가 좋아도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니 아마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이방인에게 가족이라는 뿌리에 집착하게 되는 건 정체성이라는 문제와 연결되는 듯하다. 세계 시민이라 칭하며 전 지구적 생각을 할수록 자신이 어디서 왔고, 그 근간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두는 건 더욱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다.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소소한 따뜻한 시간이야말로 해외 생활의 가장 큰 힘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해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더욱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 가족이 근거리에 살며 항상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운이고, 멀리 떨어져 애틋하게 만날 수밖에 없다면, 그 소중함의 깊이는 더욱 깊게 남으니 그건 더 큰 행운이라 여기며 살게 된다.
한국에만 있었더라면 아마도 깊이 새기지 못했을 단어가 가족이 아닌가 한다.
현재 홍콩계 회사이지만 런던에 오피스를 두고 있고, 난 홍콩-런던을 무진장 날아다녔다. 7달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은 아시아계가 대부분이고 영국 여기저기 거주 중이다. 그전에 일했던 미술관에서는 영국인, 이탈리아인, 스페인, 리투아니아, 홍콩, 그리스, 헝가리 등 유럽인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쓰며 일을 하다 보니 어디서 왔는지 그 문화적 배경이 참으로 중요한 정보가 된다는 걸 배웠다. 각 배경마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행동양식이 있으니 이것을 문화라고 하는구나를 경험을 통해 진하게 배울 수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문화권과 지지고 볶다 보면, 나와 잘 맞는 혹은 맞지 않는 인간 군상들도 찾아가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눈도 밝아지게 된다. 이런 걸 사람들은 글로벌 마인드라고 부르지 않을까 한다. 지구촌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커질수록 사고의 범위 또한 넓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인드를 얻고자 한국에서는 영어도 가르치고, 연수도 보내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녀들 혹은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외 생활의 장점은 바로 이 자연스레 형성되는 세계 시민의 마인드가 아닐까. 또 그 속에서 여러 모습의 자아도 찾아가며 어디든 유연하게 적응하고 스며들 수 있는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것, 이것이 영국에 사는 또 다른 장점이라 생각한다.
영국으로 떠나려 할 때 들었던 말이 기억난다. 런던에서 5년여를 생활하고 한국으로 막 귀국하셨던 분인데, 그분은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더라. 중요한 건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지금 있는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무엇이 너와 잘 맞고 안 맞는지를 판단하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제야."라 말씀해 주셨다.
지금 다시 그때를 돌아보니, 영국에 와서 배우고 싶은 건 얼추 다 배우지 않았나 싶다. 그럼 지금의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를 다시 깊이 생각해봐야한다.
외국 생활은 어렵지만 해볼 만하다. 특히 젊다면 더!
그리고 사람 사는 거 어디나 다 똑같다는 그 말도 정말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