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서점

그곳에서 우아함을 배웠다

by 김라희

책을 사기 위해 서점을 혼자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다. 젖소 목장 근처에 있던 경기도 아파트를 떠나 다시 서울로 오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봄방학 직전, 식구들이 서울 생활을 시작한 곳은 옥수동과 금호동을 넘어가던 어디 즈음이고, 우리 셋 그러니까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자주 가던 초록색 간판 서점은 금남시장으로 향하는 큰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부모님의 경제적 상황이 예전만 못한 때에 다시 서울로 왔다. 경기도 살 때 있던 차도 없어졌고, 집도 훨씬 작아졌으며, 우리가 이사 간 동네는 아직 재개발이 되기 전 다세대 연립과 다가주 주택이 무성하던 곳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 건강은 경기도로 이사 가기 전 보다 훨씬 좋아졌고, 밤마다 기침으로 고생하던 딸을 위해 공기 좋은 곳에서 살다가 오겠다던 엄마의 결정은 옳았다. 복음병원 엑스레이 검사 결과, 폐에 하얀 자국이 여기저기 선명히도 남았지만 더 이상 기침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이 그 결정에 더욱 힘을 실었다.


예전처럼 자주 놀러 가지도 못하고, 여행도 갈 수 없던 몇 년 동안 엄마는 서점만은 더 자주 다니셨다. 동생도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나도 3학년이 되어가니 교재와 참고서도 잘 선택해야 하고, 무료하고 어렵던 엄마 일상도 책으로 다독이셨던 것 같다. 경기도 살 때는 산으로 들로 다니던 우리 가족은 이제 서점으로 그 장소를 옮겼다.


그 서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아주머니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 직사각형 형태의 내부 모든 벽은 책으로 뒤덮여 있고, 중앙에 놓인 테이블과 창가 쇼윈도 쪽 작은 책상 위에도 책으로 가득했다. 풍경이 울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겹겹이 쌓인 책 뒤에서 우아한 단발 웨이브 머리의 주인아주머니께서 하얀 목장갑을 끼고 책을 정리하시며 우리를 반기셨다.


"또 오셨네요. 오늘은 무슨 책을 보실까?"

"아, 안녕하세요. 지나는 길에 그냥 들렸어요. 딸이 책 냄새가 너무 좋다고 해서요."

"어머, 그래요? (나와 눈을 맞추며) 너도 나중에 커서 책방 하면 되겠다. 아줌마도 책 냄새가 정말 좋아서 서점을 시작했거든."


따뜻한 머릿결과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주인아주머니의 눈빛은 너무도 우아하고 고상했다. 10년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우아한 여인의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그분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엄마에게 자주 그 분위기를 말하곤 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모습은 "우아하다"라고 표현한다고 알려주셨다. 난 그 우아함을 그 서점 주인아주머니를 통해 처음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그 우아함은 내가 좋아하던 책 한 장 한 장의 고소한 종이 냄새와 어우러져 더욱 빛을 발했다.


당시 가장 재밌게 읽는 책은 만화였다. 머리를 어떻게 묶으면 이쁜지, 옷은 어떻게 입어야 좋은지, 친구들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등을 가볍게 그림과 함께 써 내려간 류의 책들에 관심이 갔다. 아마도 발달 인지에 따져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친구와의 관계라든지 자신을 어떻게 잘 보이고 싶은지 뭐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연령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서점에서 당시 관심사를 알아갈 무렵, 엄마는 그 아주머니와 초등학교 1, 3학년에 맞는 참고서와 교재 그리고 본인을 위한 책까지 이것저것 물어보시며 서가를 옮겨가는 대화를 한참 동안 나누셨다.


그렇게 서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도 주인아주머니처럼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하얀 목장갑을 끼고 무거운 책을 정리하며 다소 헝클어진 머리라도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몸동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우아함의 아우라는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편안함으로 느껴진다.


엄마 생일 선물을 책으로 사드리고 싶다며, 동생과 둘이 서점을 찾아갔던 날도 잊을 수 없다. 모아 둔 용돈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엄마 없이 들어가려는 서점 문이 어찌나 무겁던지. 망설임과 수줍음의 마음을 안고 들어간 서점, 여전히 주인아주머니께서 반겨주신다.


"오늘은 둘만 왔네? 엄마는 어디 가셨니?"

"아뇨, 집에 계세요. 오늘은 엄마 생일 선물 사드리려고요."

"어머나! 어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대견해라. 그럼 아줌마가 엄마가 좋아하실 만한 책으로 추천해 줄게. 아마 엄마도 정말 좋아하실 거야!"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문장을 쏟아내는 그 친절한 말투에 다시 감동하며, 골라 주신 몇 권 중에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계산대로 가 돈을 지불하려는데 동생과 내가 모아 온 돈이 조금 모자랐다. 당황한 기색으로 이것보다 조금 싼 책으로 사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주머니도 엄마 선물에 함께 하면 어떨까? 하며 미소 띤 얼굴로 우리가 고른 책을 포장해 주셨다.


그 뒤로 학교 교재는 물론 만화책 그리고 아주머니의 추천 책들을 읽어가며,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갈 무렵 그 서점은 문을 닫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지나는 길에 들리려던 그곳에는 폐업 표시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렇게 초록 간판 서점이 사라지고 한 동안 서점을 다니는 횟수가 좀 많이 줄었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종로에 있는 몇 개의 큰 서점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필요한 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서점이다. 요즘은 더구나 동네 책방, 독립 서점 등 다양한 형태로 가지각색의 주인장님들이 동네 골목을 지켜가며 책방을 운영 중이다. 이런 다양함을 만날 수 있어 책방을 찾아 걷는 골목길이 즐겁다. 그리고 책방을 찾을 때마다 여전히 나에겐 초등학교 시절 추억 어린 책방 아주머니의 우아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주인아주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닮아가려는 바람도 여전하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초록 간판 서점의 추억 덕분에 아직도 난 우아한 서점 주인이 되고 싶은 꿈을 품고 산다.






덧붙이는 글,


최근 만난 기억에 남는 서점 주인분은

작년 겨울에 찾은 통의동에 위치한 역사 책방에서였다.

한 겨울 서울 방문 중 여느 때와 같이 작은 서점을 찾아 산책하던 중 만나게 된 곳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안경 낀 단발머리 주인분은 책 정리에 분주하셨다.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 한참 동안 서가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 고른 책을 계산하려는데, 차가운 눈매에 따뜻한 미소로 주인분께서 말을 건넨다.


"나이가 좀 있으신가 봐요. 굉장히 어리게 봤는데..."

"아하하 네? 뭐.... 어린 나이는 아니죠. 그런데 왜요?"

"무진기행을 구입하시잖아요. 어린 친구들은 요즘 이런 책 잘 안 읽거든요."

"하하하, 그런가요? 재밌네요!"


역사 책방을 나오는 발걸음에 재밌는 미소로 가득했다.

눈매가 날카롭던 주인분은 알고 보니 IT업계에서 임원을 하시다 역사책이 좋아 책방을 차리셨단다.

서울에 가면 꼭 다시 찾아보고 싶다.


그때는 내가 고른 책을 보시고는 또 무슨 질문을 내어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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