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밀한 호텔 생활

농밀한 밤의 추억

by 김라희


리셉션에서 키 카드를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드디어 쉴 수 있다는 기대와 안도감이 가득이다. 방 문을 열고 들어 선 호텔방은 누가 머물렀는지 알 수 없다. 부스럭지는 하얀 침대보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히 정리된 가구에 마음이 녹아든다. 창 밖엔 바다가 보이고, 하늘 높이 솟은 해가 쏟아내는 부서지는 햇살에 방은 유난히 더 눈부시다. 캐리어 가방 가득 가져온 물건은 제자리 찾아 정리하고, 뜨거운 물에 긴 샤워를 하고 나면 시원한 맥주가 날 부른다. 거슬림 없는 라운지 음악과 함께 호텔 방에서의 달콤한 휴식은 그렇게 시작된다.


승무원의 호텔 생활, 단연코 이런 모습을 상상했다.


여느 승무원과는 달리 내 스케줄은 오직 런던-홍콩이다. 한 달에 열 흘은 홍콩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런던 집과 비행기,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살던 세월이 어느덧 6년이다. 그렇게 기대했던 호텔 생활도 이젠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저 제2의 집으로 변했을 뿐. 하지만 단 하나, 그 하나만은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그건 밤, 까만 밤, 적막한 밤이다.




캐리어 두 개와 핸드백 그리고 물먹은 스펀지 같은 두 다리까지 힘겹게 이끌고 들어온 호텔 방은 다음 비행 전까지 무거운 피로를 풀어내야하는 조용한 전투적 장소다. 그 전투를 잘 수행하기 위해 의식같은 행위도 만들어 두었다.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창 밖 풍경이다. 층수가 높을수록 바닷가가 보이는 경치가 좋고, 층수가 낮다면 산과 마주하는 풍경이 좋다. 바닷가 뷰도 동향과 서향이 있다. 난 바닷가라면 동향을 좋아한다. 창 밖을 빠르게 확인하고 욕실로 향한다. 손을 씻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특이사항이 없다면 다음엔 침대로 시선을 옮긴다. 혹시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남아있지는 않는지, 청소는 잘 되었는지 꼭 침대보와 베개를 들춰본다. 별별 경험에 비춘 습관이다. 이 모든 확인이 끝난 후에야 짐을 푼다.


작은 타월을 하나 가져와 화장대 테이블에 깔고, 화장용품 및 헤어 제품을 놓는다. 귀걸이와 시계는 항상 같은 자리다. 옷가지를 정리하고, 욕실 용품을 줄 세우고 난 다음 겨우 샤워를 시작한다. 짧으면 1박 2일 길면 2박 3일을 이곳에서 보낸다. 필사적으로 피로를 풀던 초창기 승무원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홍콩을 더 많이 보고, 즐기고 와야지하는 욕심을 부리곤 했다.


그 결심은 거의 1년 차가 지나가면서부터야 실천할 수 있었다. 12시간의 비행, 온 에너지를 던져 무사히 마치고 나면 여기저기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 머리는 띵하고, 발바닥은 욱신욱신, 엘레강스한 승무원의 걸음걸이는 승객들과의 작별인사와 함께 그 자태를 잃고 만다. 레코드를 경신했다. 25시간의 수면 시간!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다 갔다. 그만큼 초창기 홍콩 생활은 먹는 일 하나 잘 챙기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이라 할만큼 고단했다. 씻는 일도 겨우하던 몇 달이 지나고 나니 그제야 여기저기 다니며 관광도 하고, 맛집도 찾아다닐 여유가 생겼다. 호텔 생활은 기대와는 달리 덕지덕지 붙은 피로와 침대 속 뒹굴거림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적응기가 끝나고 나니, 상상도 못 한 농밀한 밤이 나를 기다렸다.


8시간 시차, 홍콩에서 굳이 로컬 시간을 따르지 않는다. 오후 세 시 즈음되어 일어나 아침을 먹고, 때에 다른 일정을 본 후 저녁을 먹고 간식거리와 함께 호텔로 돌아온다. 그러면 긴 밤의 까만 정적이 온전히 남아 날 기다린다. 그 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향 바다 뷰에 집착하기도 했다. 간밤의 정적이 부서지는 시간, 떠오르는 해를 침대에 누워 바라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기에. 그런데 그것도 잠시, 방을 고르는 까탈스러움은 버리기로 했다.


산이 보이는 낮은 층이라면, 산을 마주하고 앉아 고단한 몸과 정신을 그곳에 기대는 너그러운 시간을, 주차장과 셔틀버스가 오고 가는 회색의 풍경이라면, 비행기 이륙 장면을 바라볼 수 있는 운치를, 수영장이 내려다 보인다면 사람들 모습을 바라보는 잔재미를 느끼며 상황에 맞는 유연함을 배워가는데 의미를 두어본다.


밤 열 시, 열한 시면 곯아떨어지는 난, 런던에서 이 야심한 시간을 즐기는 호사는 언감생심이다. 비행의 피로만 잘 풀어낸다면 최소 하룻밤 혹은 몇 시간은 또렷한 정신으로 이 밤을 즐길 수 있다. 커다란 캐리어 속에는 한동안 꼭 들고다니던 필수품이 하나 있었다. Bose 블루투스 스피커!


밤의 밀도가 높을수록 음악을 느끼는 감각은 온통 살아 움직인다. 바로크부터 트로트까지, 기분에 따라 울려 퍼지는 음악을 들으며, 술 한잔 기울이던 그 시간에 빠져, 저녁 약속이 있더라도 어서 호텔방으로 돌아가 그 시간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던 날들이 길었다. 비라도 내리는 밤이면 창가에 더 바짝 붙어 앉아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는 음악을 찾느라 그 밤을 더 분주하게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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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껏 꼭 들고 다니는 물건은 몰스킨 다이어리와 책 두어 권. 이 밤을 즐기며 다시 시작한 일기 쓰기, 길게는 아니지만 누군가의 문장을 빌려오며, 그 날의 감정을 쏟아내며, 체류비 사용 내용을 써내며, 잊지 않고 꼭 매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루치의 여백을 적당히 내어주는 몰스킨 다이어리는 그 기록을 담아내기에 아주 제격이다.


당시의 관심사는 책 제목으로 드러난다. 한 동안은 경제 서적에 파묻혀 지냈다. 한 2년 전 즈음이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스스로의 경제 지식이 너무 낮다고 판단해 두서없이 마구 읽어대기 시작했다. 계획도 없이 읽어나간 경제 서적과 자기 계발 책들 덕은 언제 즈음 볼 수 있을는지 의문으로만 남는다. 그러다 소설로 넘어가고, 산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교양, 역사 서적으로 범위를 넘나드는 잡식성 독서가 그 밤에 장대히 펼쳐졌다. 아직까지 중급도 접근 못한 이탈리아 어의 끼적임과 한동안은 받았던 중국어 개인 수업 덕분에 휘날리던 까만 한자는 별책부록이다.





긴 밤의 정적을 견디지 못해 일을 그만두는 사람도 있다. 항상 홍콩만 오는 지루한 목적지에 다른 항공사로 자리를 옮긴 승무원도 있다. 다행히 서른여섯, 신입 승무원에게 목적지가 매 번 바뀌는 비행 일정은 부담일 뿐이고, 긴 밤 농밀한 호텔 생활은 꿀맛과도 같았다. 운이 좋아 함께 한국 동료나 선배들과 비행이라도 같이하면, 그 밤은 질펀한 수다로 가득 찬다. 혼자도 좋고, 여럿이도 좋던 그 밤의 호텔은 또 다른 세계다.


청소도 필요 없고,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으며, 수영장도 구비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먹는 조식 뷔페도 괜찮다. 책임 없는 일상, 홍콩은 그저 잘 쉬고, 잘 먹으며 피로를 풀고 오면 되는 도시다. 그 도시, 그 시간에 각자가 만드는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누구는 호텔 헬스장에서 운동하며 몸을 가꾸고, 누구는 수영을 매 번하며, 누구는 호텔방이 답답해 밤 외출을 즐기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술로 그 밤을 달래기도 한다.


그 호텔 방, 밤의 농밀함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나를 알아가는 미로 같던 시간, 그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무엇이라도 읽고, 끼적이며 쌓아 온 시간은 결국 나를 이렇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까지 갖게 해 놓았다. 비행기 타는 일은 고되지만, 단단한 밤을 보냈던 그 시간 속 한 사람의 내면은 더 견고해져가는 듯 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봤다.


이 일을, 그 밤을 이십 대에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나는 그 농밀한 밤, 그 호텔방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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