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가 필요해
주기적으로 따라오는 "퉁" 소리는 지치지도 않나 보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 잔잔한 일상에 돌만 던지고 사라진다. 대수롭지 않으려다가도 가끔 퉁 떨어지는 마음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류의 모호한 질문과 함께 찾아오면 수습에 곤란을 겪기도 한다. 걸어도, 먹어도, 수다로도 해결되지 않는 이 반갑지 않은 손님은 달래기도 참 까다롭다.
이럴 때면 찬실이가 보고 싶어 진다. 내 또래 찬실이는 영화판에서 열심히 프로듀서로 일했지만 심장마비로 감독이 갑자기 사라진 순간 자신의 일자리와 생계는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 폭풍 속에서 자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길을 잃지 않으려 깊이 고민하며 살아낸다.
앞 뒤 꽉꽉 막혀 한 길만 파는 여인이고, 나락으로 떨어진 주변 환경 속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긍정을 찾으려는 존재이며, 돈은 일해서 벌어야 한다는 고지식한 성실함으로 삶을 밀고 나가는 뚝심 있는 여인이다. 그래도 남자 앞에선 너무도 순수하고 귀여운 천생 여자이고, 주변 사람을 뚝뚝한 살가움으로 챙기는 살뜰함도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깊이깊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 얘기다. 46살에 영화감독 데뷔에 성공했다는 김초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깔려서인지, 주인공 찬실이는 더욱 가슴으로 다가온다. 감독은 2015년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가 일 년 정도 영화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반찬 가게를 열어야겠다 결심하고, 지인들에게 반찬을 나눠주며 시험하던 중 윤여정 배우에게 부산 사투리 지도가 필요하다는 부탁을 받고 촬영 현장에 가게 된다. 그때 김초희 감독은 알았다고 한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라고. 그래서 그 후부터 한 달여간 시나리오 초고를 쓰고, 1년여 넘게 보편성을 얹기 위해 고치고 또 고쳤다고 했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바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다.
마흔이 넘어도 있어야 할 곳, 가고 싶은 곳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에 휩싸여 방황한다. 현실과 타협하며 포기하는 일이 많아질지는 몰라도 각자 가슴속 어딘가 묻고 사는 모습은 다 있다. 그러다 가끔 "나도 여기 있어, 내 모습으로도 살아줘."하고 숨었던 자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면, 다시 "퉁" 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이 그 숨었던 나를 만나 설레는 건지, 서운한 건지, 그리운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그저 "퉁" 소리로만 내어 놓는다.
찬실이는 사투리가 정말 매력적이다. 영화 거의 첫 부분에 달동네로 이사 가며 고무 "다라이" 머리에 이고, "아... 되다...." 하고 내뱉는다. 이 한숨 섞인 한마디에 고무 다라이 무거움이 다 쏟아진다. 그래서 나도 "아... 되다...."라고 뱉어 본다. 바램과 다르게 흐르는 날들을 원하는 자리로 데려오려 발버둥 치다 그저 "아... 되다..." 한마디 내어버리면, 터져버릴 듯 이상하게 부풀었던 마음에 숨구멍 하나가 뽀옥 난다. 이제사 좀 숨이 제대로 쉬어진다.
숨결을 고르는 시간, 고운 말은 감사다. 찬실이 곁, 하얀 난닝구 빤쭈 차림의 장국영과 전혀 닮지 않은 장국영 귀신도 보고 싶다. 매사 참는 성격이라 화가 많단다. 그래서 한겨울에 속옷바람이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는 코믹 인물 장국영이 있어 찬실이는 복도 많다. 너무도 자상한 장국영 귀신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다.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당신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쪼금만 더 힘을 내어봐요."
그리고 한글 배우러 다니시는 주인집 할머니 (윤여정 분). 어느 날 숙제라며 시를 쓰고 있는데 너무 어렵다고 도와 달라 신다. "시는 어렵게 생각하면 어려워요. 그냥 쉽게 생각하고 쓰고 싶은 대로 쓰세요." 터억 던져놓는 찬실이 말에 맞춤법 엉망진창 적어 내려간 할머니의 시 한 줄.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늙으면 좋은 게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좋다는 주인집 할머니,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하루를 애써서 쓴다는 말에 코끝이 매콤하다. 콩나물 다듬는 할머니와 찬실이, "그래서 할머니 오늘 콩나물 애써서 다듬는구나." 이런 주인집 할머니를 둔 찬실이는 참으로 복도 많다.
"퉁" 마음이 뜬금없이 내어놓는 소리를 찬실이와 함께 듣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 현실의 벽과 똘똘히 타협하며 그 길을 계속 걷기로 마음먹은 그녀의 삶을 바라본다. 그러다 빼꼼히 나온 잊고 있던 내 안의 그녀도 챙겨 본다. 성과 없는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에 맞서, 행복한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찬실이의 고군분투도 기억한다. 꿈을 잃지 않는 마흔 살 지지리 복도 많은 찬실이가 남긴 진정한 복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도 얘기 나눠본다. 아... 결국, 찬실이랑 술 한잔 찐하게 하고픈 아침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