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여행자>와의 산책길
여기, 수다 엑스트라 라지로 한 판 주세요!
영국 2차 록다운으로 집콕인 요즘 가장 그리운 건 비슷한 이들과 나누는 시끌벅적 수다다. 오죽하면 어디 가서 수다 한 판 달라 크게 주문하고 싶은 심정이니 말이다. 이럴 때 제일 만만한 동반자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책. 펼치기만 하면 우수수 떨어지는 작가의 말들은 적적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입은 근질, 몸은 들썩하니 책을 끼고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홀로 바쁘다. 책과 한바탕 수다를 나누려면, 진행자도 되었다가, 문답자도 되었다가 요리조리 역할을 바꿔가며 놀아야 종잇장에 붙은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무료함이 금세 흥미진진함으로 삼단 변신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엑스트라 라지 수다의 그리움은 배부른 만족감으로 잔뜩 채워진다.
마치 소개팅하듯 작가의 면모를 살피는 시간은 개구지다. 문체에 드러나는 작가의 성향을 그려보는 일도 후루룩 시간을 쏘아 보내는 재미 중 하나다. 작가 소개란에 사진이라도 있으면, 얼굴을 들여보며 혹은 문장과 단어의 조합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들의 성격과 생각을 유추하다 보면, 책 읽는 재미의 밀도는 더욱 높아진다.
헌데, <내성적인 여행자> 정여울 작가를 만났을 땐 이런 유추의 시간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무릎 치고, 혀도 찼다가 문장 끝에 추임새도 넣었다가, 어찌나 바쁘게 움직이며 책을 읽어 내려갔던지, 첫 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겠구나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만났던 그녀와의 수다가 그리워 다시 꺼내본다.
"무한 자유 여행"을 즐기는 이 여기 또 있네! 세밀하게 짜인 여행 계획표는 온갖 걱정을 덜어 내기 위한 초창기 여행 초보의 필수품일 뿐. 텅 빈 여행 계획이 주는 변화무쌍한 경험의 무지개를 걷다 보면 계획이 주는 안정감을 벗어던진 결정에 무한 칭찬을 날리게 된다.
"훌쩍 떠난다." 이러한 떠남의 정취를 깊이 아는 작가의 문장에 동질감을 느낀다. 그렇지 이게 사는 맛이지! 하며 무릎을 쳐대느라 내 주위 작은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일상적인 곳에서 만나는 자신을 벗어두고, 낯섦의 공간을 입으러 훌쩍 떠나는 길에 만나는 "내 마음의 안식처". 낯선 곳에서 되려 마음의 안식을 느끼는 본 투 비 여행자. 그 신비로운 시간에 빠져 언제든 훌쩍 떠날 준비를 안 고사는 비슷한 그녀를 만나 기쁘다.
길치 여행자라는 비슷함에 하하 웃음을 내던졌지만 "내성적인 여행자"라는 이 책 제목이 마음을 더 잡아끈다. 스스로를 내성적이라 소개하면 정말?이라는 의아한 눈빛을 받기는 하지만 내성적인 태생은 쉽사리 사라지진 않는다. 작은 모험이라도 찾아 떠나려면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더 밖을 보며 살아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녀와 난 이 점도 참으로 비슷하다.
글쓰기는 내향성을 안 고사는 사람들의 간절한 무기라고 정여울 작가는 얘기해준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발산하는 글쓰기, 내성적 여행자가 담아놓는 예민하고 세밀한 추억 이야기를 담은 이 여행기와 발걸음을 맞추다 보면, 자연스레 그녀의 에피소드 위에 개인적인 추억도 얹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집콕이고 뭐고 어서 떠나자!라는 마음만 가득이다.
어디든 떠나고 픈 역마의 기가 올라오면 꺼내 드는 책이 몇 권있다. 그중 한 권 <내성적인 여행자>는 동질감을 입은 안식처와 같은 책이다. 비슷한 이를 만나고 싶을 때면 꺼내 들곤 빠르게 책장을 넘긴다. 그러면 어느새 수다의 희열이 내린다. 더불어 개인적 경험에 보편성을 더할 수 있는 내성적 작가의 예민함에 감사와 부러움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