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연예인을 좋아했던 건 신해철이다. 무한궤도에서 대차게 노래 부르던 그의 모습에 넋을 잃어버렸던 게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그 후로 솔로로 활동하던 발라드 왕자 시절을 지나 마왕으로 가는 길까지 그의 행적에 꾸준히 관심을 두었다.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삶이란 어쩔 수 없다는 걸 그를 통해 다시 느끼기도 했다. 런던은 아직 11월 30일 밤이다. 꼭 이 날만되면, 이유도 없이 괜히 쓸쓸하다. 그러면 예전에 써 둔 일기장이나 글들을 찾아 뒤적인다.
작년 11월 19일 자 기록이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지나치게 매진하다 보면 지치게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스스로 재시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재시작이 삶을 이어가는 굉장한 힘이다. 마치 컴퓨터가 과부하 걸리면 아무 이유 없이 멈춰버리고, 어떠한 버튼도 말이 듣지 않을 때, 코드를 그저 살포시 뽑아 버리면 큰 문제는 해결되는 이치와 같다. (저장되지 않은 파일들은 저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지라도…)
일과 과제가 버겁고 무거울 때 잠시 멈춰 한 숨을 쉬 건, 담배를 한 대 물어 피던. 문제를 더 이상 부풀려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구해 낼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당시 <Reboot Everything>이라는 신해철의 짧은 강연을 보고 적어둔 기록이다.
나에겐 과연 재시작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 있을까?
지나친 스트레스나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있을 때, 구해줄 수 있는 수단 그런 게 있나?
요즘은 쓰는 일에 매진 중이다. 잘하고 싶어서 매일 끼적이다 보니, 쓰는 이유나 동기 그리고 소재 등을 스스로 찾아 계속 밀고 나가야 하는데, 오늘처럼 감정에 매몰되기라도 하면, 아직도 쓰는 일이 제일 먼저 뒤로 밀린다. 남편은 틈이 있을 때마다 묻는다. 이렇게까지 매일 쓰려는 이유가 뭐지? 무엇을 쓰고 싶은 거야? 그대가 쓰는 이야기의 주제는 뭐야? 시원스레 답이 나오지 않으니, 그의 질문은 계속 꼬리를 문다. 요즘 부쩍 그 질문에 압박이 느껴진다. 오늘도 계속 답을 찾으려 걸으며 생각하고, 누워 있으며, 밥하며, 밥 먹으며 설거지 하며 생각해 봤지만 명확치 않다.
그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런던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였다. 영어도 부족한데, 한 달에 한 번은 에세이, 피칭, 발표 순으로 매 달 일정이 빡빡했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이 말도 못 했다. 그 중압감에 벗어나려 선택한 수단은 어이없게도 한국 TV 프로그램이었다. 이 최악의 선택 덕분에 1학년 내내 난 데드라인과 씨름하느라 진을 다 뺐다. 한국어 TV를 보며 도망 다녔다. 회피일 뿐이니 드라마나 예능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간만 흘렸다. 그 의미 없던 연예인들의 말소리는 중독성 있는 편안한 감정으로 오해되고, 결국 또 데드라인을 향해 쓰는 일을 미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문단씩만 매일 썼어도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없이 썼을 텐데... 여하튼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면서 무언가 정지와 직시가 필요함을 느꼈다. 과제를 받으면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부터 몰려왔고, 그 생각을 먼저 멈춰야 했다. 거리두기. 시간이 있으니 잠시 과제와 거리를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며, 운동하러 다녔다. 땀을 흘리고 사우나를 하니, 긴장은 풀어지고 잠이 잘 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거리를 두고 나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과제를 열어볼 수 있다. 하나씩 천천히 해보고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고 안심을 시켰다.
굉장히 중요한 리듬이다. 잠시 멈추고, 천천히 다시 들어가는 그 리듬을 찾을 수 있었기에 2, 3학년은 그래도 데드라인의 덫에서 벗어 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잠시 멈출 것인가?
언제 잠시 멈출 것인가?
멈추는 동안 무엇을 하며,
다시 시작하는 시간을 기다릴 것인가?
이 기록을 남겼던 당시, 승무원 5년 차를 지나가고 있었고, 조금은 더 적극적인 삶을 살아내고 싶은 욕구가 컸다. 승무원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도 밑그림이 명확치 않았다. 그래서 질문만 던졌다. 그리고 딱 일 년 후 정말 쉬고 있다. 2020년을 꼬박.
그리고 다시 기록을 본다.
아마도 지금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만약 그런 때가 온다면, 미리 준비해 두라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닐까? 아직은 일을 쉬는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떠 문제라도 상황을 외면하지는 말자. 그리고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거나 완벽하지 않음에 절대 자책하지 말자. 그리고 난 결심했다. 지금보다 더 창조적인 시각과 관점으로 무엇이든지 쓰고, 만들어 세상에 내어 나누고 싶다고.
이러한 결심을 실행하다 보면, 반드시 지칠 때도 있고, 생각했던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조바심이 날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조바심을 갖지도 말자. 그럴 땐 한 걸음 물러나 잠깐 멈출 줄도 알자. 그렇게 숨 고르고 다시 가면 된다.
가끔 지난 기록을 볼 때면, 놀랄 때가 있다. 과거의 나는 무엇을 알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19일의 난 어떻게 알았을까? 이렇게 매일 쓰는 일에 매진하며, 무엇이라도 창조해내고 싶은 욕구를 천천히 실행해가고 있으리란 걸.
지금 너무 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결심은 어떻게든 행동을 이끈다는 걸 다시 본다. 이렇게 과거가 말을 걸어오는 날에는 꼭 귀를 기울여본다. 그 기록의 마지막은 이 말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의무는 끝난 것이다." 마왕의 위로였다. 완벽의 강박, 무언가 해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숨구멍이다. 그리고 꼭 찾을 것이다. 왜 쓰고 싶은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래서 기록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