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사 온 사과는 맛과 향이 유난하다. 이탈리안 식재료를 찾기 위해 자주 찾는 아레나라는 식료품점에서 사 온 사과다. 마르레네(Marlene)라는 상표가 붙어있어 찾아보니 이탈리아 알프스에서 재배되었단다. 한국에서는 꿀이 가득한 부사, 홍옥, 아오리, 홍로 등 가리지 않고 다 맛있게 잘 먹지만, 꿀이 든 부사를 조금은 더 편애했다. 이 곳 런던에서는 레이디 핑크의 색과 향에 흠뻑 빠졌다. 크기가 작아 좀 아쉽긴 해도. 매일 아침 사과를 깎아한 입씩 천천히 베어 물며 잠을 깨곤 한다. 요 며칠 함께한 마르레네는 향이 근사하다. 생긴 건 부사와 비슷한데 레이디 핑크가 뿜어내는 향긋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의자에 털썩 앉아 빈 눈으로 사과를 베어 물다 보면, 어느 날은 아무 생각 없이 사과 하나를 빠르게 다 먹어 치울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생각이 꼬리를 물다 사과가 누렇게 변할 때까지 다 못 끝낼 때도 있다. 향긋한 마르레네 사과 탓인지 어제, 오늘은 문득 지나간 인연들이 떠올랐다. '누구누구는 잘 있을까?' '걔는 사업 잘하고 있겠지?' '연락이 왜 뜸해지게 되었더라?' 연말 인사를 나누며 오고 가던 이름 속에 그들이 섞여 있지 않아 아쉬워서였을까. 지나간 그 모습을 향긋한 사과향에 얹어 천천히 추억해 봤다. 그런데 유난히 길고 아쉽게 머무는 얼굴 하나가 있다. 튀어 오르는 스무 살 생기를 어쩔 줄 몰라 그야말로 울고 웃으며 시간을 나눈 청춘의 우정이었다.
이상한 여자였다. 학교 화장실에서 처음 마주친 그녀는 느닷없이 내게 이름이 뭐냐며, 연락처를 묻고는 함께 있던 친구들과 까르르 웃고 장난치며 사라졌다. 친해지고 나서 그녀에게도 말했지만, 그때 그 첫인상은 어디가 좀 고장 난 여자인 줄 알았다. 너무 특이해서. 그녀와 난 학교 조별 과제 덕분에 친해졌다. 함께 과제를 하다 보니, 똑똑한 구석도 있고, 재주도 많아 보인다. 그리고 속 시원하게 통통거리는 매력이 재미있다. 주위 산만한 그녀는 내 얘기를 들을 때만은 조용해졌다.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좋았지만, 남다른 그녀의 반응을 더 좋아했다.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그녀와 난 대학 생활 동안 찰떡같이 붙어 다녔고, 학교 졸업 후에 각자 다른 길을 걸었지만 연락을 나누며 그 누구보다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몇 년 후 시간은 날 영국으로 그녀는 사업하는 여인으로 데려다 놓았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고 자리 잡느라 그랬는지,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날 때마다 날 선 신경전이 알게 모르게 이어졌다. 여인들의 호르몬 문제이겠거니, 그녀의 사업이 아직 자리잡기 전이니, 내 영국 생활이 고되어서겠거니 하며, 불편한 감정을 서로 감춘 채 몇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 성수동을 다녀오던 길에 난 그녀가 뱉은 어떤 말에 상처를 받았다. 그녀에게도 어딘가 언짢고 불편한 기색이 보인다. 긴 세월을 조금씩 꼬여버린 감정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무슨 말로 풀어야 할지 몰라 서울에 있던 일주일 동안 그녀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런던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좀 지나 이야기하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게 우리의 서른 어디 즈음을 함께 나눈 마지막이 되어버릴 줄도 모른 채.
어제는 문득 그녀의 사업은 잘 되고 있는지, 잘 지내는지 안부가 궁금해 인스타그램으로 그녀의 안부를 넌지시 들여다봤다. 그녀는 수채화 그리기를 시작했다. 더욱 여성스러워지고, 취향은 확실해졌으며, 사업은 자리 잡은 듯하다. 사진 속 그녀는 좀 더 여성적으로 변했고, 여전히 감성적이고, 예민한 듯 느껴진다. 우리의 청춘을 돌이켰다.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쏟으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시간이 길었다. 여느 학생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으로 나아가 사회생활을 위한 기반을 닦기에 우리는 유별났다. 정체를 알 수 없이 꿈틀거리기만 하던 그 유별난 에너지가 그때는 삶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을 어찌하면 좋을지조차 모른 채, 남들 따라 걷던 서른이 너무 낯설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예민했구나',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들을 수 없는 질문만 남긴 채 엄한 사과만 베어 문다.
'지금 이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 매 순간 그 형체를 바꾸는 추억, 그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쓰다 보니 젊던 우리의 시간이 흐릿해졌다. 그래도 마음속 그 시간만은 곱고 따뜻하게 남긴다.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 친구에게 윈저 앤 뉴튼을 선물을 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투박한 행동 끝에 묻어나는 섬세한 감각을 가꿔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세잔과 에밀 졸라를 얘기한 그 영화처럼 다시 한번 터 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가끔 지난 일을 꺼내 놓고는 '그게 아니었더라면'이라 상상하는 날이 있다. 오늘 아침처럼. 그리곤 이내 지금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마르네레처럼 레이디 핑크 향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만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