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튼 바다를 바라보며
저 너머 수평선이 어렴풋하게 그어진 창을 배게 머리 위에 두고 깊이 잠든 새벽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 있다. 까악, 까악, 까악, 밀도 높은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는 갈매기 울음소리. 부비적 부비적 그 소리를 알람 삼아 눈 뜨던 날은 고작 넉 달이었다. 바닷가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새롭기만 한 서울 여인에게 그 알람 소리는 그저 낭만이다. 긴 날개 덩실거리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갈매기를 올려보며, 그곳의 아침이, 짠 물기 머금은 바람이 닿아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꿈은 아닌가 싶었다.
회사 생활 한참 하던 어느 해 갑자기 떠난 남도 여행에서 바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서울을 떠나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이민 가방 하나에 기대어 떠나온 바닷가 마을 브라이튼, 히드로 공항에서 내 이름 석자 들고 기다리던 생면부지 택시 아저씨 미소에 잔뜩 긴장한 마음 풀어 두고 향하던 조이스 할머니 댁, 처음 집을 구해 살아 본 바닷가 앞 세인트 캐서린 길가의 이층 집. 넉 달의 기억이 거기에 오롯이 다 담겼다.
'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어떤 느낌일까?' 항상 궁금했다. 브라이튼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던 순간부터 매일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그저 모든 게 풍요로웠다.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한정된 시간 덕에 바다를 만나는 일만큼은 절대 게으르지 않았다. 아침을 걷고, 저녁을 걸었다. '세상에나, 저렇게나 많은 물이 어떻게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곳까지 넘실거리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너머 바다를 건너보면 또 다른 땅을 밟을 수도 있겠지. 브라이튼 너머 저곳에는 어느 동네가 있더라?' 하늘을 넘나들며 공간을 이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나에게 바닷길은 아직도 너무 궁금한 미지의 세계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 듯 바다는 하늘을 무척이나 닮았다. 하늘이 밝으면, 바다는 더욱 빛났고, 하늘이 찌푸리기라도 하면, 바다는 그 모습이 안타까운지 더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랑하는 사람을 닮고 싶은 그 마음은 언제 나에게 찾아 오려나 하는 외로운 고민을 철없이 담아보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오면, 제멋대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정돈하느라 정신없는 나와 다르게 바다는 제멋대로 춤추기 시작한다. 바다의 춤동작엔 바람의 얼굴, 손짓, 몸짓이 다 담겨있다. 그 생동감과 자유로운 움직임을 바라보는 시간을 사랑했다. 언제라도 바람이 창을 두드리면, 어느새 바닷가 앞에 자리하고 그 바다와 바람을 한참 바라봤다.
감히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함, 사랑하는 하늘과 손잡은 수평선, 그 너머를 상상케 하는 신비로움, 형체 없는 바람의 모습을 마음껏 그려내는 자유로움 그리고 매일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그 생동감까지. 이 바다를 모두 가슴에만 품고 지낸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연의 나와 맞닿은 고향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느낀다. 도심 속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구겨진 바람이 있는 그곳이 아닌 바람이 제 팔을 다 벌려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너른 바닷가, 어디를 둘러봐도 빵가루처럼 부서져 내리던 도심 속 시선이 아닌 저 멀리까지 속 시원히 마음껏 소통할 수 있도록 생각을 열어주는 바닷가의 시선에 그제야 제대로 고향을 찾은 듯했다. 고작 넉 달이라 그랬던 걸까? 도시에서 사는 시간, 다시 바다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