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도 눈이 왔어요
서울에 내린 눈 사진을 여기저기서 만나며, 런던에도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바란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어머나 이게 웬일! 바람대로 눈님이 내려오신다! 적막하던 거리에 무슨 일인지 시끌벅적 사람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깼다. 눈꺼풀에 매달린 잠을 채 밀어내기도 전에 커튼 먼저 걷어 재쳤다. 창 밖을 타고 내려오는 함박눈이 어찌나 반갑던지 '꺄악!'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한 손에 스노보드를 들고 장난치며 걷는 십 대들, 알록달록 눈썰매 끼고 재잘거리는 아이들, 모닝커피 들고 시끌벅적 아이들 단속하느라 더 시끄러운 어른들, 눈이 내리는 것뿐인데 적막하던 거리는 어느새 시끌벅적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덩달아 신이 난 나도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빨간 모자에 외투는 대충 걸쳐 입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눈이 내리면 왜 그리도 신이 날까?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신이 난 마음에 후끈 달아올라 그런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걷고 걸어도 힘만 더욱 솟구친다. 소복소복, 서걱서걱 눈 밟는 소리에 장단 맞춰 두서너 시간을 걷다 보니 아름다운 겨울의 정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매 년 쉽게 만날 수 있는 눈이 아니니, 하얀 담요가 이렇게나 소복이 덮이는 날이면, 모든 순간을 남기고 싶어 진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2010년 런던의 겨울이. 서울에서도 흔히 만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눈이 며칠을 내려 버스도 끊기고, 학교도 일주일 정도 쉬었던 때가 있다. 그렇게 주어진 일주일간의 자유시간, (그만큼 과제는 더 늘어나긴 했지만...) 그 며칠을 온전히 집에서 귤만 까먹고 있을 내가 아니다. 온 동네를 걸으며 옴팡지게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당시 함께 살던 엘씨 할머니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하얀 백발이 멋스럽던 할머니의 모습이 하얀 세상과 너무도 잘 어우러졌다. 갑작스러운 부산스러움에 할머니는 싫은 내색이셨지만, 사진 속 모습에서는 어찌나 크게 잘 웃으셨는지. 액자에 담아 가족사진 옆에 놓아드렸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눈이 내리는 날 할머니와의 부산스러운 추억은 지금 꺼내도 너무 예쁘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일에 푹 빠져 있던 때였다. 지금은 책장 사이 우두커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니콘 FM2 사진기를 울러 매고 공원으로 향했다. 집 앞에는 런던 전경이 멋있게 내려다 보이는 알렉산드라 파크가 있었고, 그곳에는 한아름 크게 안아도 반도 다 못 감쌀 만큼의 커다란 나무들이 참 많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 털옷이라도 이쁘게 입혀 놓은 듯, 그렇게 소복이 쌓인 눈을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 떨어져서도 바라다봤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영국 사람들은 눈이 오면 스노보드를 탔고, 어린 아이들은 플라스틱 썰매를 볼이 빨개질 때까지 끌었다. 함께 썰매 타고 싶은 심정이 굴뚝이었지만, 그 마음은 묻어두고 사진기 친구 삼아 그 모습을 담아내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낮시간을 한참 보내고 집에 돌아와 얼은 몸 녹이며 먹던 뜨끈한 라면 한 그릇 그리고 잠깐의 단잠, 그 노곤한 시간을 보내고 일어나면 어느새 밤이 찾아와 있다. 그리고 다시 눈이 내렸다. 마음이 자꾸 급해진다. 행여 눈이 녹아 없어져 놀 수 없을까 봐. 그 해에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눈이 녹을 틈도 없이 다시 내려 쌓였으니.
어느 날 밤 하루는 눈 내린 공원의 밤이 문득 궁금했다. 겁도 없이 목도리 하나 둘둘 감고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서는 길,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하는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공원의 밤은 눈부셨다. 두텁게 쌓인 하얀 눈이 밤하늘의 빛을 반사하며 그 밤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붉게 빛나는 눈이 덮인 밤, 그 밤을 누구의 발자국도 닿지 않은 길을 따라 걸었다. 나서는 길에 들었던 망설임에 발걸음을 그만두었더라면 가장 소중한 장면 하나를 놓쳐버릴 뻔했다.
사람들의 숨은 위트가 오롯이 담긴 눈사람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당근과 오렌지 껍질은 코, 동그란 초콜릿은 눈, 빨간 석류로 입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올해는 마스크 낀 눈사람도 등장했다. 눈이 내렸을 뿐인데, 아이의 마음 같은 순수함이 발걸음마다 밟힌다. 그래서 눈 내리는 날이 좋다. 동네 친구들과 눈싸움하느라 커다란 함성으로 골목을 채우던 어린아이가 되어도, 눈이 내리면 만나자 약속하던 사춘기 소녀가 되어도 다 괜찮으니.
사람들은 아주 가끔 나에게 감춰둔 마음을 표현할 때가 있다. '아직 아이가 없어서 그런가...?' '에긍, 아직 철이 좀 더 들어야 할 것 같아.' '이제 좀 어른스러워야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예전에 하지 않던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꿈꾸듯 좀 철없이 살면 안 되는 걸까?', '아이가 없는 마흔 줄의 여인이 내뱉는 감정의 표현은 철없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구나.' 그런 말에 잠시 흔들릴 때도 있지만, 나는 나다운게 무엇보다 좋다. 눈이 오면 신이 나는 걸 어쩌나, 신이 나면 소리도 지르고, 덩실덩실 춤도 추며 표현해야지. 그렇게 모아 온 순간이 겹겹이 쌓여, 어제 내린 눈을 바라보는 마음에 기쁨만 더욱 충만했던 것을. 소담하게 내려앉은 하얀 담요를 바라보며, 더 철없이, 더 순수하게 그리고 더 나답게 살아가자 더욱 굳게 다짐했다.
드디어 글과 함께 이 사진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하다. 2010년 그 날의 순간들이 오롯이 담긴 필름 사진들
Alexandra Park, 2010, 사진: 김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