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날지 모르는 봉쇄 생활을 위하여
지난 끝 여름 런던으로 돌아오던 길, 비행기 안에서 읽은 하루키의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을 떠올린다,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서문에 나오는 제목이다. 42.159킬로미터를 달리는 마라토너들의 만트라 mantra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온다. 길고 험난한 레이스를 끝까지 완주하기 위한 각자의 만트라, 길고 긴 싸움을 끝까지 해내기 위한 자신만의 암시, 주문. 그중 하루키는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어느 마라토너의 만트라를 인용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그는 달리기를 말하기 위해 이 문장을 내어놨지만, 나는 봉쇄령을 건강하게 마치기 위해 이 문장을 선택한다.
밤 11시 30분, 잠자리에 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지난 연말부터 일상의 리듬이 조금씩 흐려졌다. 새벽 시간을 아끼던 사람이 밤 시간과 외도 중이다. 어느덧 그 연애가 열 흘을 넘어간다. 느지막이 일어나 커튼을 열면 회색빛 하늘만이 새로운 아침을 알린다. 아침은 매일 새롭게 오는데, 커튼을 열어재끼는 내 모습은 매일 같다. 어제부터 시작된 봉쇄령에 창 너머 보이는 길가에는 침묵만 더욱 바쁘게 서성인다. 지금부터는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산책길, 슈퍼마켓 가끔가다 커피 테이크어웨이, 만나는 사람은 짝꿍, 어쩌다 산책길 길동무 한 명 정도 그리고 택배 기사분들의 벨소리뿐. 쓸 수 있는 공간이 극도로 제한된 시간은 왜 그리 길기만 한지, 그 안 머문 행동은 왜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려고만 하는지 모르겠다.
곱게 단장했던 날은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사람 만날 일이 없으니 편한 차림으로 집을 지킨다. 정성스레 거울을 바라보는 시간도 부쩍 줄었다. 아무리 집을 따뜻하게 데우려 해도 발은 왜 그리 시린지. 알록달록 두꺼운 수면 양말은 24시간 발을 감싸고 있다. 발끝만큼 한기가 드는 곳은 어깨다. 두터운 스웨터를 입자니 그 하찮은 무게도 버거워 얼마 전부터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솜사탕 같은 수면 잠옷을 어깨에 걸쳐둔다. 재작년 홍콩에서 사은품으로 받아온 남색 무릎 담요가 요긴하다. 머리는 간편하게 질끈 하나로 묵거나 가볍게 올려 핀으로 고정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편하게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을 지내다 보니 몸무게는 늘어가는지, 피부 상태는 어떤지 영 알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 이러다 갑자기 비행 일정이라도 나오면 큰일인데. 잘 맞던 유니폼 사이로 지금 시간이 남긴 이 모든 것을 욱여넣어야 할 테니.
봉쇄령이 내려지던 저녁 답답한 마음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변이는 더 빠르게 전파된다고 하고, 늘어가는 확진자 숫자는 이제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괴물로 변해가는 듯하다. 다시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내야 한다. 마라토너들의 만트라를 외워보자. 고통이라 단정 짓고 그렇게 눌려 있을 수 없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은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시간을 유용하게 쓰며 나름대로 잘하고 있었는데, 새 해 벽두부터 내려진 봉쇄는 좀 버겁게 다가온다. 이럴 때 읽어둔 책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갑자기 떠오른 문장이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이라니.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을 정해두고 매일 의식처럼 해나가며 제한된 공간, 늘어진 시간을 관리해봐야겠다. 그러지 않고는 이 길고 까만 겨울날의 봉쇄를 건강하게 마칠 수 없을 듯싶으니.
하루를 맞이하는 모습을 조금 더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하고, 미뤄두었던 이탈리안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다른 이들의 글 읽는 일을 더 소중히 다루며, 매일 쓰는 시간을 몰입으로 꽉 채워 보자. 그리고 매일 아침 걷는 일에 소홀하지 말자. 그리고 밤과의 외도는 이제 그만 두자. 그 달큼한 매력에 빠지다 보니 새벽의 청명함이 다 날아가버렸다. 부족한 게 많은 마음, 매 번 다짐하고 다짐해도 한 번씩 이렇게 흐트러지는 마음가짐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렇게 지내던 시간 중 맞이한 봉쇄에 마음이 어느 때보다 좀 더 떨어졌다. 툭툭 털고, 건강한 봉쇄 생활을 위한 만트라를 외워보자. 매일 아침 커튼을 열며, 샤워를 하며, 아침을 먹으며,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이탈리안 단어를 외우며, 산책길 발걸음을 내딛으며...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