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날을 기다리며
잔뜩 날이 궂은 아침이면, 나가려던 일정을 몽땅 취소해 버리고만 싶다. 그러다 어쩔 도리가 없으면, 가장 튼튼하고, 커다란 우산 하나를 골라 든다. 그렇게 우산에 기대 좀 걷다 보면 운이 좋게 비는 잦아들고, 바람은 거짓말처럼 종적을 감춰버릴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곤 어느새 반짝이는 해를 우산 삼아 걷는 나를 본다. 이럴 때면, 변덕스러운 섬나라 영국 날씨가 고마워 죽겠다.
눈부신 해를 만난 건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보내고, 둘째 조카가 태어난 날을 함께 할 수 있던 1월뿐. 이내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1월 말, 중국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유난히 거슬렸다. 한국에서 런던으로 돌아올 때 쓴 마스크가 어색하기만 했는데, 그 날의 어색함은 익숙함으로 변해버렸다.
가랑비인 줄로 알고 적당히 피해 가려했는데 장대비였다. 옴짝달싹도 어렵다. 게다가 폭풍우까지 몰아친다. 엄마가 아프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게 5월이고, 비행 스케줄이 멈춰 선 건 4월이다. 좋은 일도 이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면 좋으련만. 왜 어렵고, 불편한 일은 꼭 깡패처럼 몰려다니는지. 이제 겨우 아침을 먹었을 뿐인데, 날이 너무 깜깜하다. 엄마를 만나러 서울로 다시 갔다. 2주 자가 격리 후 삐쩍 마른 엄마를 만나던 그 날의 아침 공기가 지금도 싫다. 그래도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날 우리 식구를 지켜주던 우산이 튼튼했으니.
다 젖은 신발을 말리고 싶다. 해를 기다리는 동안 글을 써 본다. 백일을 꼬박 기도하듯 글을 쓰다 보면, 단 하루라도 해는 나오겠지? 새벽을 밝히는 정신이 눈부시다. 글을 통해 다른 이들의 삶도 더 자주 들여다본다. 혼자만 비바람을 맞고 있다 느꼈는데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의 온기가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깜깜한 낮, 두터운 회색 구름 속 저 멀리 어렴풋한 빛이 내려온다.
비바람에 엉망이 된 옷이 무색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가 반짝 얼굴을 내민다. 영국의 날씨는 그래서 얘깃거리가 많다. 올해 내가 살아온 시간이 꼭 그렇다. 참 흐렸는데, 눈부시게 밝았다. 까만 날을 밝히는 작은 것들, 밝은 날은 내리누르는 묵직한 것들이 뚜렷이 공존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을 글로 담아 둘 수 있었다.
그리움을 이토록 깊게 느꼈던 시간이 또 있을까? 그리움은 설렘이라던 가사말이 떠오른다. 그러면 지난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 설렘 가득한 시간을 보낸 게 된 셈이다. 그렇게 두고 싶다. 그리고 폭풍우 몰아치는 빗길을 지켜주던 튼튼한 우산이 되어준 모든 분들을 기억한다. 오랫동안 그리던 쓰는 시간은 이제 설렘으로 매일 아침 새벽을 밝힌다. 흐리고 밝은 날들은 무슨 이유에서라도 계속될 테다. 그럼 그럴 때마다 2020년을 떠 올려보려 한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그리고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더 많은 분들께 새해 인사드립니다.
2021년 모두에게 더 깊은 지혜, 인내, 기쁨 그리고 사랑 가득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항상 찾아주시고, 라이킷으로 응원 주시며 댓글로 온기 전해 주시는 작가님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문장을 이어가는 힘은 그곳에 있다는 걸 점점 더 느낍니다.
2020년 12월 31일 23시 34분
런던에서 김라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