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일요일,
우산이 벌써 세 번째 뒤집혔다. 더 이상 바람에 맞서 우산을 들 수 없을 것 같아 접어 버렸다. 그랬더니 안경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거슬린다. 안경도 벗어 버렸다. 긴 머리를 아무리 가다듬어 보려 해도 거센 바람은 그럴 여유를 남겨두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해라.' 요 며칠 바깥 일정이 있어 유난한 바람 사이 빗길을 피할 길이 없었다. 긴 카디건이 비바람에 다 젖어 무거운데 그 와중에 꽃집 앞을 한동안 서성였다. 결국 꽃 두 단을 사서 들고는 홀딱 젖어 집에 들어왔다. 채 오분이 지났을까, 눈부시게 집 안 가득 해가 들어온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날 나가 걸은 건 내 선택인데 어찌 날씨 탓을 할 수 있을까. 영국 살면서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선수가 되어 버렸다. 예전 같으면, 우산이 세 번 뒤집힐 정도의 거센 바람이 불면 나가지 않거나, 나가야 한다면 입이 댓발 나와서는 불평을 입에 달고 다녔을 테지만 이젠 그런 마음을 재빨리 비울 수 있는 요량이 생겼다. 피할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그런 날이 있는 걸. 있는 그대로 지내다 보면, 해도 나고 따뜻해지기도 하겠지. 그저 허허실실 웃게 된다.
마음 가짐, 마음먹기 따라 달라지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쉬운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아간다. 비가 와서 옷이 젖으면 말리면 되고, 바람에 머리가 엉망진창이 되면 돌아가 다시 빗질을 하면 된다. 불평은 소용이 없다. 듣는 사람만 고달픈 것을. 그러니 점점 더 말을 아끼게 된다. 몸으로 부딪히며, 마음가짐을 새로 고치려 노력한다. 사람 관계를 떠올려 본다. 다들 사느라 애쓰는데, 굳이 내 사는 얘기까지 더해가며 어렵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또다시 허허실실 더 웃게 된다. 바람도 내리는 비도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면 이해 못할 게 없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어쩔 수 없으니 관계를 맺을 때도 있고, 마음을 내어주고 상처를 받을 때도 있고, 기대만큼 관계가 진전되지 않아 속상해할 때도 있었다. 그 시간을 다 지나 언제부터인가 관계에 대한 기대를 내려 두게 되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대로 억지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그런 내 모습을 차갑다고 말하기도 한다. 무슨 도리가 있을까. 나무 허리가 휘어질 만큼 불어대는 바람도 다 이유는 있겠지. 사람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다 이유가 있겠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한다. 우산이 뒤집혀 쓸 수 없으면 접어드는 것처럼 관계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도 그저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바라보려 한다. 허허실실, 어쩔 수 없는 영국 날씨가 가르쳐주는 마음 가짐의 요량이 한 층 더 두터워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