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by 김라희

5월 28일 금요일,


하루 동안 길고 짧은 만남을 통해 총 여섯 명과 함께 아침, 점심 끼니를 나누고 커피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여러 사람을 만나 각기 다른 주제와 친밀도로 대화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니 무언가 뿌듯한 마음과는 달리 머릿속은 뒤죽박죽 좀 어지러웠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조용한 침묵에 집중하려 몸을 담가본다. 피곤이 녹아내리는 나른함과 함께 느닷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랑받았던 순간, 기억에 남은 그 순간들은 언제였을까?' 그렇게 흐르는 기억에 기대어 하나, 둘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 한순간에 오랫동안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큰 고모의 품 속, 무릎 위 고모 품에 포옥 안겨 가슴 울림으로 전해지는 고모 목소리에 가 닿으니, 그 시간의 편안함 속에 더 머무르고만 싶어 졌다.


고모의 사랑은 그야말로 무한대였다. 고모집에서 자고 오는 날이면, 산책 삼아 친구 집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시며 세상 제일 이쁜 조카가 왔다는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고모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내가 고모집에 가 있는 날이면, 언니 오빠보다 무엇이든 먼저 챙기시고, 그 옆자리에는 항상 나를 두셨다. 고모는 동물과 친구를 향한 애정도 깊었다. 평생 개와 고양이를 길렀고, 한 동안은 토끼를 키우기도 했다. 토끼가 장롱 뒤로 숨어 들어가 한바탕 소동을 피우던 그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르니 웃음이 삐죽 삐져나온다. 집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찾아왔고, 전화벨 소리는 꽤나 자주 울렸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도 망설임 없이 커다란 나를 품에 포옥 안아 주셨다. 그러니 품에 안겨 가슴을 타고 전해지던 그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작은 체구의 고모는 친구들 사이에서 만큼은 대장이었고, 술도 노래도 즐겨하시며 밝게 지내려 노력하셨는데, 그 삶은 원하는 만큼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술 한잔 기울이시며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는 눅진한 고단함이 언제나 묻어 있었던 것 같다. 그 품속에서 고모의 시간을 가슴으로 전해 들었던 난 당시에는 그 음성을 그저 아늑하고 편안한 자장가 같은 것으로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지금 돌아보니 오고 가는 술잔 속 어른들의 대화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자주 만날 수 없으면 전화 통화라도 짧게 하며,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 우리 조카, 라희다. 고모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하며 다 클 때까지 그 사랑을 전해 주셨던 분이다.


그렇게 고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오랫동안 든든하게 함께 지낼 수 있겠지 하던 그 당연함은 너무 빨리 찾아와 버린 고모의 죽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허망하게 한 순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떠난 고모가 안타깝고 미웠지만, 쏟아주신 그 사랑에 어떻게든 대답이라고 하고 싶었다. 장례식 장을 더 밝히고 싶어 모아 둔 용돈을 털어 커다란 근조 화환을 혼자 주문하고 돌아오며, 고모의 음성은 꼭 간직하자 마음먹었다. 삶은 결국 사랑하고 그것을 나누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던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른다. 고모의 고단한 삶이 너무도 일찍 끝나버리긴 했지만, 작은 체구 안에 숨어있던 그 큰 사랑만큼은 내가 이렇게 기억할 수 있으니, 그 삶이 어찌 허망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너무 흔해 그 진심마저 흐릿해진 사랑의 의미를 다시 돌이켜 본다. 사랑받고 있는 순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느꼈던 기억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지키고 있다는 확신, 그런 순간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상처, 좌절, 슬픔, 실망 혹은 허무함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때가 찾아와도 어느새 다시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와 삶을 이어갈 힘을 얻어 일상의 발걸음을 다시 내딛게 된다. 지금껏 받아왔던 사랑의 순간을 떠올리다 보니 책임감이 생긴다. 누군가의 삶이 단 한순간이라도 내가 뿌린 사랑의 순간을 떠올리며, 삶을 지속할 힘을 얻게 된다면 좋겠다 아니 그렇게 해야 맞는 것이다라는 확신이 든다. 느닷없이 시작된 시간 여행을 끝내며 조금 더 다정하고, 살갑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해보자고 다짐한다. 더 많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눈빛과 미소를 나누며, 내가 받았던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을 더 자주 나누자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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